2000명 증원 정책에 맞서 일 년 넘게 집단휴학
'유급·제적' 경고에 "복귀 후 수업 거부"로 선회
제자들에게 충고하는 교수 향해 과격한 비난도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새 학기의 설렘으로 가득 찬 캠퍼스 분위기와 달리 의과대학 건물 내부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텅 빈 복도엔 간간이 흰 가운을 입은 교수와 행정직원으로 보이는 이들만 지나다닐 뿐이었다. 널찍한 스터디룸에선 학생 한 명만이 홀로 전공 서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정문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환하게 웃고 떠드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 의대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오가는 사람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고요한 의대 건물 로비 건물 한쪽에 위치한 카페에서는 손님 한 명 없이 직원 혼자 멀뚱멀뚱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불 꺼진 강의실 사이로 매점만 덩그러니 환한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의대생 카르텔의 시대]①소리 없이 집단화한 그들](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32109482877640_1742518108.jpg)
의대생들이 전공의 등 선배들의 투쟁 기조에 발맞춰 휴학에 돌입한 지 1년2개월. 길고 긴 투쟁 끝에 대부분이 '일단 복귀'라는 경로를 택했지만 사태가 완전히 정리됐다고 보는 이는 드물다. 의료계 등의 향후 움직임에 따라 이들이 꺼내 들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투쟁 카드는 아직 남아있다.
의대생들은 캠퍼스에서 집회를 열거나 시위를 하지도,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있다. 의대별로 모이는 카카오톡 단체톡방이나 의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나누고 분노하며 집단행동을 도모할 뿐이다. 학교로 돌아오라는 의대 교수들의 설득과 호소에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낸 것도 온라인 게시판과 인터넷 기사 댓글 창이었다. 이런 의대생들의 시위 방식을 중국 신조어에 빗대 '탕핑(가만히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다)'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시아경제가 접촉한 24학번·25학번 의대생들은 대부분 입학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단체행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서울 소재 의대 24학번 A씨는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정부에서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고, 선배들로부터 의사 증원이 필수·지방의료를 살리기보단 또 다른 문제점들을 발생시킬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휴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A씨는 이 과정에서 학생 개개인의 판단보다는 '다 같이 동참해야 대의를 이룰 수 있다'라는 암묵적인 강요와 회유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전공의들마저 줄줄이 사표를 내는 상황에서 초반엔 사태가 한두 달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고, 중간중간 정부의 휴학 승인이나 전공의 수련 특례 같은 회유책이 나오니 잘못된 증원 정책도 곧 철회될 줄 알았다"며 "하지만 2학기 휴학이 계속되고, 25학년도 신입생까지 들어오게 되자 휴학에 참여하면 같은 편, 휴학하지 않으면 배신자라는 구도는 더욱 명확해졌다"고 토로했다.
의대 증원 이후 입학한 25학번들은 가뜩이나 '증원 혜택을 받았다'라는 눈총과 함께 휴학에 동참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욱 크게 느꼈다. 교육부의 '의과대학 학생 보호·신고센터'에 접수된 사례들엔 그 실태가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입학식을 하기도 전에 휴학 동참에 관한 온라인 투표 공지를 전달받았는데 이름과 연락처를 모두 적어야 하는 기명투표였습니다. 휴학이 최선의 방법은 아닌 것 같지만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비난 글들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매장당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껴 결국 찬성했고, 학교 근처에만 가도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으로 보일까 봐 기숙사 방에만 머물며 극심한 우울과 식욕 저하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니 부모로서 가슴이 아픕니다."(25학번 의대생 학부모)
"처음엔 휴학 여부에 대한 설문이 단톡의 익명 설문 기능을 이용해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다음번 설문에선 학번과 이름을 입력하도록 방식을 바꾸더군요. 선배들은 절대 휴학을 강요하지 않겠다 했지만, 사실상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25학번 의대생)
그 사이 의사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서 나온 발언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국민 여론도 악화했다. '조선인이 응급실에서 죽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생길 것' 등 도 넘은 발언은 의사와 의대생들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병원에 복귀한 전공의들을 '참의사'라고 비꼬며 개인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공개한 행위에 대해선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지난 17일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등 서울대 의대 교수 4명이 돌아오지 않는 의대생과 전공의를 향해 "의사 면허 하나로 전문가 대접을 받으려는 모습이 오만하기 그지없다"며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자 의료계 내부에선 한층 더 과격한 비난이 쏟아졌다. '당직 떠넘기고 싶으니 제자들이 보고 싶은가' '정치에 기웃거리는데 치료를 잘하겠냐'라는 비판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채웠다.
결국 정부와 대학들이 내년도 증원을 원점으로 되돌릴 마지막 기한으로 정한 3월 말이 지나도록 의대생들의 수업 복귀 여부는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일단 등록금을 납부한 뒤 수업을 듣지 않는 방법으로 제적을 피하자'라는 의견부터 '어차피 그 많은 의대생을 한꺼번에 제적시킬 수 없을 테니 다 같이 등록을 거부하면 된다' '남학생들은 입대부터 하자' 등 꼼수와 강경책이 난무하며 혼란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대 학생들이 등록 거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단체 카톡방에 '미등록 인증'을 유도하자 교육부가 이를 경찰에 수사 의뢰하기도 했다. 인증하지 않는 학생은 사실상 동맹휴학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만큼 복학 신청자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한 의대 교수는 "학생들은 전국 40개 의대가 다 함께 행동해야 증원 원점화와 필수의료 패키지 철회 등 본인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하지만 학칙상 마냥 수업을 거부할 수 없고, 더욱이 수업받겠다는 다른 학생들의 신상을 공개하거나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매우 폭력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의대생과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대다수 의대생이 작년 2월부터 1년 넘게 무단으로 수업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학사 일정을 유예하며 편의를 봐주는 게 비의대생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한 공과대학 재학생 B씨는 "의대 학우들이 집단휴학을 시작한 이유가 일면 이해는 되지만 정부와 대학이 의대생들에게 끌려다니듯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저들은 우리와 다른 특권층인가 싶다"며 "의대생의 유급·제적만 '봐주기'가 가능하다면 이건 다른 대학생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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