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 위법 판단에도 은행 '중단 시점' 못 밝혀
감정평가사협회, 공정위 제소·감사원 청구 검토
금융기관의 부동산 담보 자체 감정평가를 둘러싼 감정평가업계와 은행권의 갈등 법적 대응 국면으로 번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은행 자체평가를 위법으로 판단했고, 국정감사에서도 여러 차례 같은 지적이 나왔다. 금융위원회도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은행권은 자체평가 중단 시점을 밝히지 않고 있다.
협의 교착…특정 은행 물량은 3배 급증
지난해 11월11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감정평가사들이 자체 감정평가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규탄대회에는 감정평가사 약 300명이 참석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
17일 감정평가업계에 따르면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금융권과 합의가 무산될 경우 은행의 자체평가를 시장 내 불공정행위로 보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고, 이를 묵인해 온 금융당국을 상대로 감사원 공익감사를 청구할 계획이다. 협회는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금융위 중재로 열린 연석회의에서 자체평가 중단 시한을 최대 3년 유예하는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은행권은 2030년 이후에도 현행 물량의 50%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의가 교착된 사이 자체평가 규모는 오히려 커졌다. 4대 시중은행 중 KB국민은행이 특히 두드러진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KB국민은행의 자체평가 금액 비율은 2021년 19.89%에서 지난해 상반기 44.60%로 3년6개월 만에 두 배 넘게 뛰었다. 건수 기준으로도 같은 기간 6.72%에서 17.82%로 세 배 가까이 급증했다. 소속 감정평가사는 18명에서 26명으로 늘었다. 이 같은 비중 확대는 실제 물량 폭증으로 이어졌다. 협회는 KB국민은행의 자체평가 규모가 2022년 26조원에서 2024년 약 75조원(추정)으로 2년 만에 세 배 가까이 불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융위가 2022년부터 매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받으며 개선을 약속해 왔지만, 실효성 있는 조치가 따르지 않은 결과다. 협회는 지난해 9월부터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8차례에 걸쳐 규탄대회를 열었다. 올해 들어서는 협상 진전을 기대하며 집회를 중단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국토부 '위법' 판단했지만…시정 권한은 금융위에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2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국토교통부 답변 자료. 국토부는 해당 자료를 통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과의 실무 회의에서 금융기관 자체 평가의 법 위반 소지와 시정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다고 밝혔다. 국회방송 화면 캡처
금융기관의 부동산 담보 자체 감정평가가 금지된 건 1969년부터다. 그전까지 금융기관은 담보물 가치를 자체적으로 판단했는데, 돈을 빌려주는 쪽이 담보 가치까지 매기다 보니 은행별 평가 기준이 제각각이었고 대출 실적을 위해 담보를 부풀리는 일도 잦았다. 부실 대출이 늘면서 금융기관 건전성까지 흔들렸다. 정부는 독립된 감정평가기관(현 한국부동산원)을 설립하고, 1973년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금융기관의 외부 의뢰 의무를 명문화했다. 이후 법률명과 조문 번호는 바뀌었지만, 감정평가법인 의뢰 의무는 53년간 일관되게 유지돼 왔다.
하지만 은행은 금융감독원의 하위 행정규칙인 '은행업감독업무 시행세칙'에 기대어 자체평가를 계속해왔다. 해당 세칙은 비주택 부동산의 담보가치를 산정할 때 국세청 기준시가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의 자료를 활용하면 은행이 자체적으로 가격을 평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위법인 감정평가법이 금지한 행위를 하위 행정규칙이 허용하는 셈이다.
현행법상 형사 처벌이 어렵다는 점도 은행권이 자체평가를 유지하는 배경이다.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은 '감정평가업'을 "타인의 의뢰에 따라 보수를 받고 감정평가를 업으로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은행권은 자사 소속 평가사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므로 '타인의 의뢰'가 아니고, 별도 수수료도 주지 않으니 '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은행의 논리대로라면 처벌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은행이 감정평가사들의 거대 고객사라는 지위 때문에 묵인해온 자체평가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하자 주무 부처인 국토부가 움직였다. 지난해 9월 유권해석을 통해 은행의 자체평가가 위법이라고 처음으로 공식 판단했다. 은행 소속 평가사가 '토지 등의 경제적 가치를 판정하여 그 결과를 가액(價額)으로 표시하는 것'은 감정평가법 제2조 제 2호의 '감정평가'에 해당하며, 이를 외부 감정평가법인(또는 평가사)에 의뢰하지 않은 것 자체가 법 제5조 제2항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건 소관 부처가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평가법 소관은 국토부지만, 은행을 감독하고 시행세칙을 고칠 권한은 금융위·금감원에 있다.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부처와 이를 시정할 권한을 가진 부처가 다르다. 국토부는 유권해석 이후 사실상 손을 뗐다. 금융위가 꾸린 태스크포스(TF)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미 위법으로 판단한 사안을 협의 대상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역시 은행과 감정평가업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만 하고 있다.
고액 담보에 집중…"이해충돌 불가피"
협회에 따르면 은행의 자체평가 물량은 전체 감정평가 시장의 1%에 불과하지만 대상은 평균 120억원대 고액 부동산에 집중돼 있다. 고액 부동산은 산정 오차만으로도 대출 규모가 수십억원씩 달라져 부실 대출이나 배임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게 협회 설명이다.
은행 내부에 고용된 감정평가사는 인사권과 성과급 체계 안에 있다. 조정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은 "돈을 빌려주는 쪽이 담보 가치까지 직접 매기면 이해충돌이 불가피하다"며 "은행 소속 평가사가 영업 부서의 압박을 이겨내고 대출 이익과 배치되는 낮은 감정가를 소신 있게 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은행 소속 평가사가 영업 부서의 이해와 상충하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2024년 상반기에만 시중은행 두 곳에서 담보가치 부풀리기를 통한 배임 사건이 550억원 규모로 적발됐다.
은행권 일각에서는 외부 의뢰 의무화 시 수수료 부담으로 대출이자가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감정평가 수수료는 2008년 공정거래위원회 약관 개정과 2012년 대법원 판결을 거쳐 은행 부담으로 확정된 사안이다. 협회 관계자는 "4대 은행의 순이자이익이 각 10조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법 위반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체평가에 집착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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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담보 평가의 공정성을 높이려면 대출·평가 분리 원칙부터 재확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 위원장은 "미국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제3의 기관이 중개하는 등 객관성 담보 수단을 보강했다"며 "어떻게 공정하고 안전하게 평가해 금융 안정성을 지킬 것인지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시장 분석 기법을 고도화하고, 거래가 없는 침체기나 폭등기에도 적정 가격을 산출할 수 있는 평가 체계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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