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의 비상식적 폭언과 독단으로 인해 빚어진 서울시향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표 개인의 특별한 성격 외에도 민간의 경영마인드가 공공기관에 들어올 때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번 사태가 잘 드러내지 않았던 것, 그러나 그렇게 주목을 받지 않음으로써 결국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은 이 시향이 시민들과 얼마나 가까운 존재였을까, 새삼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서울시향은 서울 '시립' 교향악단이지만 그러나 서울 '시민'의 교향악단이 돼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이 교향악단이 물론 시민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서는 노력을 적잖게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을 통해서 그 존재를 새삼 알리고 있다는 점이 드러내는 현실은 서울시민과 서울시향 간의 거리, 나아가 서울시민과 예술 간의 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으로 대변되는 예술에의 접근과 향유가 여전히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보여준다.
18,19세기 작곡가 중에 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이가 있다. 당대 제일의 음악가로 꼽혔던 인물로,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등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그에게서 배웠다. 그런데도 음악가로서의 그의 이름이나 작품은 지금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음악사에서는 잊혀진 그의 이름이지만 우리에겐 다른 이유로 친숙하다. 바로 영화 '아마데우스' 덕분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과 좌절감에 사로잡힌 그는 울부짖는다. "신이여, 왜 제게 갈망만을 주고 재능은 주지 않았습니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모차르트의 '천재' 앞에서 절망하는 그의 모습은 음악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을 하나 일깨워준다. 즉 음악은 당대의 유명 음악가조차 초라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범재(凡才)는 얼굴을 내밀 주제가 못 되는 천재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있지 않은가 싶다.
다른 어느 예술 분야보다 '천재'가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예술인 클래식 음악계의 역사는 숱한 천재들의 화려한 경연장이다.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음악계에 전해 내려오는 많은 천재들의 일화는 '음악은 천재의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가령 그의 빼어난 연주를 듣다가 청중들이 흥분해 실신하기도 했다는 파가니니에게 붙었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은 천재 음악가에게 보내는 헌사이자, 평범한 재능의 진입을 금지하는 경고문과도 같다.
그렇다면 모차르트가 되지 못할 거라면, 파가니니가 되지 못할 거라면 음악은 감상자의 위치를 넘어서서 함부로 직접 뛰어들려 해서는 안 되는 영역인가. 그러나 '기적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 이야기는 평범한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면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달동네 빈민가의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면서 가난과 부패, 범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다.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는 28세의 나이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구스타보 두다멜처. 그러나 모든 아이가 두다멜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전문 연주자의 직업을 가지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의 음악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
이는 정경화나 사라 장, 임동혁 같은 세계 수준의 연주자들을 배출한 나라이면서도 보통 사람들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접근과 그 향유가 매우 쉽지 않은 우리나라에 특히 던지는 질문이다.
천재(天才)는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천 개의 재능으로서의 '천재(千才)'다. '물수능'이니 상위권의 변별력 상실이니 하는 얘기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이 점이다 . 서울시향 사태에서 찾아야 할 또 하나의 메시지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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