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이 신작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를 오는 3월13~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한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제7대 왕 세조(수양대군)와 세조의 권력욕으로 희생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우리 음악을 통해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 새롭게 풀어낸 창작 창극이다.
'허공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보허자는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전래해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으로 수용된 악곡 중 하나로, 듣는 이의 무병장수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곡이다. '장춘불로지곡'이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선(神仙)의 존재를 동경하는 도가 사상과 맞닿아있다. 이번 작품에서 보허자는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동경하지만, 이상과 다르게 현실에 얽매인 채 발 디딜 곳 없이 허공을 거니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뜻한다.
극본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세조로부터 실권을 박탈당한 안평대군이 강화도와 교동도로 유배된 지 8일 만에 사사되었으나, 그의 무덤이나 태실, 비문 등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극 중 안평은 나그네로, 수양은 죽은 뒤 안평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으로 등장한다.
창극 보허자는 1480년(성종 11년), 계유정난(세조가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 비극이 벌어진 지 27년 후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안평의 딸이자 유일한 혈육이었던 무심(無心)은 변방의 오랜 노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다. 안평을 모시던 화가 안견(安堅)은 안평의 첩이었으나 관노비가 된 후 불의의 사고로 몸과 마음을 다친 대어향(對御香)을 찾아내 남몰래 거두고, 무심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폐허가 된 옛집 수성궁 터에서 마주쳐 회포를 풀고 추억을 나눈다. 그 가운데 안평을 기억한다는 이름 모를 나그네(안평)가 대화에 끼어든다. 나그네의 어깨에는 그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수양)이 붙어있다. 이들은 안평이 꿈에서 본 낙원을 그린 '몽유도원도'가 보관된 왕실의 원찰(願刹) 대자암으로 함께 여정을 떠나고, 그 속에서 갈망했던 옛날의 꿈과 마주한다.
보허자의 연출은 제54회 동아연극상과 제9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김정이 맡았다. 이번 작품으로 창극 연출에 처음 도전하는 김 연출은 "어디에도 발 디딜 곳 없이 허공을 떠도는 보허자의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라며 "꿈이자 희망이었던 몽유도원도를 향해가는 과정을 통해,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에서도 어딘가 있을 희망을 품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할 것"이라고 밝혔다.
창극의 핵심인 작창과 작곡, 음악감독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 '리어' 등 다수의 국립창극단 작품에 참여해 온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교수 한승석이 맡았다.
무대디자인은 창극 '리어', '베니스의 상인들'의 무대디자이너 이태섭이 맡아 비극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꿈의 폐허'를 그린다. 이와 더불어 연극 '웰킨', '리처드3세', '처의 감각' 등에서 감각적인 조명디자인으로 2022 동아연극상 무대예술상을 수상한 조명디자이너 신동선, 창극 '정년이'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는 의상디자이너 유미양이 합세해 무대 미학을 완성한다. 안무에는 현대무용 안무가 권령은이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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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안평) 역은 창극 '리어'에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80대 노인 역할을 소화하며 호평을 받은 김준수가 맡았다. 낙원을 꿈꾸었으나 삶의 공허함만이 남은 안평의 회한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대자암의 비구니 본공과 도창 역은 '트로이의 여인들', '패왕별희' 등에 출연한 김금미가 분하고, 안평 곁에 넋으로 맴도는 수양 역은 이광복이 맡았다. 안평의 딸 무심 역 민은경, 안평이 사랑했던 여인 대어향 역 김미진, 안평의 꿈을 그려낸 화가 안견 역의 유태평양이 출연한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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