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가득 채운 어르신들 新풍속도
끼니 해결보단 '소통' 찾아 나선 고령층
'시니어 소비' 증가세…老 양극화 우려도
"나물 종류가 많아서 참 좋네. 집에서 이거 다 무치려면 손이 얼마나 가는데…."
19일 정오께 서울 중구 명동의 한 3성급 호텔 뷔페.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관광객 대신 화사한 스카프를 두른 70~80대 여성들이 줄지어 입장하기 시작했다. 정행미씨(74)는 막 도착한 친구와 팔짱을 끼고 소녀처럼 웃으며 뷔페로 들어섰다. 좌석 대부분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이었다. 서울 도심의 호텔 식당이 '능동적 노년층'의 현대판 사랑방이 된 풍경이었다. 전복죽을 담던 정씨는 "친구들과 한 달에 10만원씩 곗돈을 모아 호텔에 식사하러 나오곤 한다"며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제 내 몸과 행복을 위해 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3성급 호텔 뷔페에서 어르신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음식을 고르고 있다. 최근 도심 호텔 식당이 외출과 소통을 위해 모인 고령층의 ‘사교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호수 기자
'호텔 런치'는 핑계일 뿐…진짜 목적은 '소통'
합리적인 가격대의 호텔 식사 등을 매개로 외출과 소통을 택한 '액티브 시니어(은퇴 이후에도 여가·소비·사회 활동을 즐기며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고령층)'가 늘어나며 고령층의 소비 지형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이른바 '할줌마(할머니와 아줌마의 합성어) 런치'는 한 끼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특급호텔 식당의 호사와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 2만~3만원대 평일 뷔페지만, 어르신들에게 이 식사는 끼니 해결에 더해 '집 밖으로 나올 명분'을 더한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이모씨(73)는 "집에 있으면 TV만 보다 하루가 끝나는데, 이렇게 나오면 옷도 골라 입고 화장도 하고 사람도 본다"며 "음식보다 어울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호텔 관계자는 "상설 운영으로 변경한 뒤 손님의 90% 이상이 60~80대로 바뀌었고, 혼자 오시는 분도 적지 않다"며 "어르신의 입맛을 돋우는 냉면이 가장 인기 메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풍경을 '해체된 공동체'의 대안적 형태로 본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랑방과 동네 모임이 사라진 자리를 상업 공간이 대신하고 있다"며 "돈을 지불해서라도 밖으로 나와 소통하려는 행위는 일종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의학적 관점에서도 고령층의 이런 외출이 권장된다. 최성혜 인하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치매학회 이사장)는 "사회적 고립은 치매의 중요한 위험 인자 중 하나"라며 "어르신들께서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 자체가 두뇌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무료급식소 줄 서는 노인도…"양극화 해소해야"
일각에선 새로운 '시니어 소비' 양상이 고령층 양극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한국은 2024년 12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기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시니어 소비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말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분석을 보면 2023년 65세 이상 소비 총액은 243조8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2% 증가했다. 특히 여가·외식 등 소비가 크게 늘며 시장 주도권이 고령층으로 이동하는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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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교수는 "3만원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노인이 있는 반면, 서울 무료급식소에는 여전히 긴 줄이 늘어선다"며 "소비 양극화가 사회적 관계의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간 소비를 주도하는 고령층과 복지 체계에 의존하는 고령층 사이의 간극을 메울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호수 기자 lak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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