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받겠다고 하다 선고 전날 빼가
재판부는 알지 못한 채 양형 결정
“제도 악용 재판부 속이려는 의도”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공탁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피해자가 판결 선고 전날 공탁금을 ‘기습출급(수령)’하는 사례가 알려지며 논란이 예상된다. 피고인의 공탁 사실은 재판부에 통지되지만, 피해자의 공탁금 수령 여부는 재판부에 통지되지 않는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것인데, 일부 판사들은 “재판부를 속일 의도가 명백해 보인다”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주거침입 및 절도 혐의로 구속기소 된 피고인 A 씨는 피해자와 합의에 실패한 후, 첫 공판기일에서 모든 범행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공소장에 기재된 피해 금액을 지급하기 위해 형사공탁을 진행했다. 이후 피해자는 엄벌 탄원서와 공탁금 회수 동의서(피고인이 공탁금을 다시 찾아가도 좋다는 동의서)를 제출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공탁금 회수 동의서를 제출하며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며 피고인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피해 금액 전액에 대해 배상명령도 인용했다. 일반적으로 재판부는 공탁금 회수 동의서가 제출되면 피해자가 공탁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판결 선고 바로 전날 공탁금을 전부 수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피해자의 공탁금 수령 사실이 재판부에 통지되지 않아, 재판부가 이를 알지 못한 채 양형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1심 선고 이후 공탁금 수령 사실을 알게 된 피고인은 항소심을 통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지만 만약 항소심 선고 전날 피해자가 ‘기습수령’해 간다면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한 상고가 제한될 수 있어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탕으로 재판이 확정될 가능성이 생긴다.
피해자가 공탁제도를 악용해 ‘기습수령’한 사례가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실무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빈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법원 공탁 담당 직원은 “피해자가 회수 동의서를 제출한 뒤에도 판결 선고 직전이나 직후에 공탁금을 찾아가는 경우가 실무상 종종 있는데, 이해하기 어렵다”며 의아해했다.
지금까지는 피고인이 공탁제도를 악용하는 ‘기습공탁’(판결 선고 직전에 공탁을 진행해 재판부가 별도의 피해자 의사 확인 없이 이를 감경 사유로 양형에 반영)과 ‘먹튀공탁’(형사공탁으로 감형받은 뒤,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한 공탁금을 몰래 회수하는 방식)이 주로 문제 돼 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무부는 올해 7월 형사공탁 시 재판부가 피해자의 의견을 의무적으로 청취하도록 하는 절차를 신설한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형사공탁금의 회수를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공탁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해당 법안들은 9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에 따르더라도 공탁금 출급(수령)에 대한 통지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규정은 없어 피해자가 재판부를 속이려고 하면 사실상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공탁금을 수령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재판부에 엄벌 탄원서와 공탁금 회수 동의서를 제출한 피해자가 이를 뒤집고 재판부 몰래 판결 선고 전날 공탁금을 기습적으로 수령한 것은 재판부를 속일 의도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 지방법원 판사는 “신의칙에 반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며 “형사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태료 부과 등 적절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공탁금이 출급될 때 재판부에 그 사실이 통지되지 않고, 재판부가 이를 조회할 수도 없어 현재로서는 피해자의 공탁금 수령 사실을 재판부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이러한 방식으로 법원을 적극적으로 속이려는 피해자가 있다면 형사책임을 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형사법원, 공탁관, 검찰(피해자) 간에 정보 확인이나 의견 교환이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재판부에 전산 시스템을 통해 공탁금 출급 사실을 자동으로 통지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의뢰인(피해자)에게 이런 방식으로 조언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재판부를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라며 “만약 이러한 피해자의 행동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앞으로 피해자를 대리하는 사건에서 공탁금 회수 동의서를 제출한 뒤 판결 선고 직전에 공탁금을 출급하라고 조언해야 할지 고민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해 회복과 피해자의 용서를 중심으로 본다면 형사공탁은 피해자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맞고, 이를 피고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부차적”이라며 “기습수령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항소심에서 다투거나 배상명령에 대한 이의 등 별도의 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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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명, 조한주 법률신문 기자
※이 기사는 법률신문에서 제공받은 콘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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