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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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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세밑 단골 레퍼토리, 줄거리 유사하지만 내용은 달라
발레 속의 발레 '자기언급'…안무가들 작품 속에 시대상 투영
베자르, 재즈·댄스스포츠 혼용…뉴욕시티발레단 첫 흑인 기용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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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트리, 크리스마스 마켓에 캐럴이 울리고 성탄 카드를 주고 받는 아이들.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풍경에 차이콥스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빼놓을 수 없다.


해마다 12월이면 국내 양대 발레단인 국립 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뿐 아니라 세계 각지를 대표하는 발레단과 오페라 극장이 '호두까기 인형'으로 북적인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설정은 문학과 영화에서 익숙하지만 무대 예술에선 '호두까기 인형'만큼 성공한 고전이 없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시원은 문학이다. 독일의 문호 E.T.A 호프만(1776~1822)이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왕'을 써 1816년 발표하고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가 '호두까기 인형 이야기'로 각색했다.


프랑스의 안무가 마리위스 프티파(1818~1910)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에서 호프만-뒤마의 텍스트를 공연 대본으로 재각색했다.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가 이에 맞춰 음악을 채우면서 오늘날 유행하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원형이 잡혔다. 1892년 연말 초연에 앞서 프티파의 병환으로 그의 제자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를 이어받는 곡절도 겪었다.


문학가들이 텍스트로 정리한 내용과 발레로 수놓아진 세부는 서로 다르다. 발레에서도 재안무가에 따라 설정과 결말이 바뀐다. 하지만 대략의 줄거리는 유사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주인공 소녀 클라라(호프만 원작에서는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는다. 남동생의 장난으로 인형이 망가지고 클라라가 인형을 안고 잠들면서 배경은 클라라의 꿈속으로 바뀐다.


호두까기 인형이 쥐들과 싸워 이기고 왕자로 변해 소녀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과자 궁전에서 성대한 파티가 펼쳐지고 각각 개성적인 춤들이 덧붙여지면서 무도회는 이어진다. 환상에 젖은 클라라가 꿈에서 깨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호두까기 인형'이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유려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있다. 1곡 '정경'을 시작으로 15곡 '왈츠와 아포테오즈'까지 연주 시간 약 85분 동안 펼쳐지는 작곡가 특유의 섬세한 가락과 애잔한 정서에 클래식 팬들은 매료되고 만다.


'발레 음악의 거두'인 에르네스트 앙세르메(1883-1969), 피에르 몽퇴(1875~1964), 옛 소련 시대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와 키릴 콘드라신(1914~1981)은 '호두까기 인형'을 클래식 공연으로 무대에 즐겨 올렸다.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현 마린스키극장 총감독 발레리 게르기에프 같은 러시아 출신 거장들의 '호두까기 인형'은 동시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의 1막 눈의 왈츠 장면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공연사에서 '호두까기 인형'의 미덕은 실패한 초연작을 고전으로 재생하는 교과서 같은 발전 과정에 있다. 초연 이후 페티파는 이바노프의 안무를 비난했고 차이콥스키는 이듬해 별세했다. 당시 마린스키극장 관객들은 발레에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예술 풍조가 개입된 요소들을 비난했다. 창작자가 돌아서고 관객이 외면하는 악조건에도 러시아와 옛 소련의 오페라 극장 책임자들은 초연작의 장점을 살렸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극장(현 마린스키)에서는 바실리 바이노넨이,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는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호두까기 인형'을 재생했다.


한국에서는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이 각각 바이노넨, 그리고로비치 버전으로 팬들과 만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성탄의 환상은 나약함을 의미한다. 바이노넨 버전은 이에 맞춰 요정 대신 꿈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클라라를 등장시킨다. 그리고로비치 버전에서는 호두까기 인형 역을 인형이 아닌 작은 무용수가 맡고 '요정의 춤' 장면에 색채감을 강조한다.


'호두까기 인형'의 볼거리는 2막 과자 궁전 장면에 빼곡하다. 눈송이 춤부터 스페인·중국·아라비아·러시아 춤, 사탕 요정의 춤과 꽃의 왈츠는 성인 관객이 충분히 감동할 만한 환상적인 장면으로 연출된다.


특히 사탕 요정의 춤에서는 아침 이슬이 내려앉은 듯 영롱한 소리가 나는 '첼레스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첼레스타는 프랑스에서 공수한 악기로 사탕 요정의 우아한 솔로를 감미롭게 지원한다. 악기와 동작이 조응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무용사에서 '호두까기 인형'이 귀중한 건 발레 작품 내에서 발레를 다루는 이른바 '자기언급(self-reference)'이 자연스럽게 안착한 결실 덕이다. 문학의 '액자식 구성', 연극의 '메타 시어터'처럼 '호두까기 인형'은 무용 범위의 표현 예술에서 '자기반성'이 가능한 장을 열었다.


모든 것이 춤으로 표현되는 '호두까기 인형'은 무도회를 설정하고 디베르티스망(막간의 짧은 발레)으로 '춤추는 행위'를 가시화한다. 무도회가 당시 유럽 사회에서 담당한 사회적 기능을 비추는 동시에 발레 작품 내부에서 예술 형태로서 발레를 대상화하고 재정의한다. 로맨틱 발레의 대표작 '지젤'에서 춤 좋아하는 소녀를 그리는 방식이 '호두까기 인형'으로 한층 강화된 셈이다.


안무가들에게 '호두까기 인형'은 자신들이 바라본 시대상을 작품에 투영하는 캔버스이자 팔레트였다. 원작의 플롯이 단순한 나머지 개작을 보면 재안무가의 주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97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가 시도한 버전은 마린스키극장 공연이 꿈인 소녀 클라라가 선물로 받은 발레 슈즈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노이마이어 버전은 동시대성을 감안하면서 장르에서 발레에 대해 재론한 '자기언급'의 효시다.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존 노이마이어 호두까기 인형 (C) HAMBURG BALLET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모리스 베자르 호두까기 인형 (C) BBL - Gregory Batardon

철학적 주제를 작품에 즐겨 담았던 '20세기 발레 혁명가' 모리스 베자르(1928~2007)의 '호두까기 인형'은 기존 줄거리마저 완전히 무시했다. 대형 비디오 스크린에 거인 같은 베자르의 형상이 비치고 "모두 어린 시절을 돌아보라"는 베자르의 권유로 춤판은 벌어진다.


고전 개작에서 포인트 슈즈와 정통 기교를 강조한 베자르는 '호두까기 인형'에 현대무용, 재즈, 댄스스포츠 동작도 끌어다 썼다. 안무가의 동작 혼용으로 작품이 다채로운 상징을 머금게 되고 발레의 표현 영역은 넓어졌다.


1991년 벨기에 브뤼셀 소재 왕립모네극장에서 초연된 마크 모리스 버전 '하드 넛(Hard Nut)'은 만화가 찰스 번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성탄 전날 클라라가 TV를 보고 있다. 대부로부터 바비 인형, 로봇, 록스타 형상의 호두까기 인형까지 선물 받고 자신은 갑자기 인형 크기로 변해 왕자와 함께 지도에 불이 켜지는 곳으로 세계 여행을 떠난다. 뉴 미디어와 항공기의 발달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남성판 '백조의 호수'로 유명한 영국 안무가 매슈 본도 '호두까기 인형' 버전을 남겼다. 댄스 뮤지컬을 주창하는 본의 버전은 원작의 독일 중산층 가정 대신 고아원에서 시작한다. 원생들이 함께 모여 스케이트를 타는 하얀 빙판, 봉봉 왕자와 슈가 공주의 유쾌한 춤이 펼쳐지는 사탕과자 나라의 연출은 성공한 뮤지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튀튀(발레리나가 착용하는 스커트)를 입은 무용수 대신 근육질의 마초가 등장하는 본의 버전은 예술보다 오락물이다. 국내 안무가 제임스 전은 주인공을 소녀가장으로 설정했다. 어린 동생의 심장병 치료비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 버전이다.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반가운 겨울손님, 발레 '호두까기 인형' 조지 발란신 버전 '호두까기 인형'에 뉴욕 시티 발레단 역사상 처음 흑인 주역으로 캐스팅된 샬롯 네브레스(오른쪽) (C) NYCB

2019년의 시대상을 반영한 '호두까기 인형'은 뉴욕시티발레단에서 나왔다. 1954년 게오르게 발란친(1904~1983)이 만든 버전에서 주인공 마리 역은 줄곧 백인 아동이 맡았다. 하지만 올해 처음 흑인 소녀인 샬럿 네브레스가 캐스팅됐다.


발레단 측은 "단순히 다양성의 일환으로 네브레스를 캐스팅한 게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네브레스는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 2015년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수석 무용수가 된 미스티 코플랜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마리 역에 더블 캐스팅된 소피아 토마풀로스는 한국·그리스계이고 왕자 역은 중국·남아시아계가 맡았다. 2020년대에도 고전의 가치를 계승하면서 동시대와 호흡하는 '호두까기 인형'이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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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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