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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키우는 호르몬이 따로 있었다[과학을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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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신호가 해마에서 기억이 되는 순간

기억은 어디서 만들어질까. 우리는 흔히 기억을 신경세포 간 연결, 즉 시냅스의 문제로 생각해 왔다. 학습이 반복되면 연결이 강해지고, 그 결과 기억이 남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연결이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을 촉발하는 신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명확한 답이 없었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제시한 답은 의외의 물질이다. 키와 신체 조직의 성장을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장호르몬이다. 성장호르몬이 학습이 이뤄지는 순간 뇌 해마에서 빠르게 생성돼, 기억을 저장하는 세포가 성숙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규명됐다.


강봉균 기초과학연구원(IBS) 기억 및 교세포 연구단 단장 연구팀은 성장호르몬이 해마의 기억저장 세포(엔그램 세포)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벤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성장호르몬은 해마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에 필수적이다(Growth hormone is required for hippocampal engram cell maturation)"이다.

기억을 키우는 호르몬이 따로 있었다[과학을읽다] 성장호르몬(GH)에 의한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 학습 직후 기억저장 세포(engram cell)에서 성장호르몬(GH)이 증가하면,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세포에서는 신경세포 간 신호를 보내는 능력이 강화되는 시냅스전 강화(presynaptic strengthening)가 일어난다. 이와 함께 시냅스 가시돌기(spine) 수가 늘어나면서, 해당 신경세포는 기억저장 세포(engram cell)로 기능하게 된다. 반대로 성장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는 변이체(DN-GH)를 발현하면 이러한 시냅스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 기억저장 세포로의 전환과 기억 회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림 하단은 성장호르몬이 작용하는 경우에만 기억저장 세포에서 신경 신호 전달이 강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I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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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언제' 결정되는가…학습 직후 몇 시간이 갈랐다

기억은 특정 경험을 할 때 활성화된 일부 신경세포에 저장된다. 이 세포들은 이후 구조와 기능이 바뀌며 '기억저장 세포'로 성숙하고, 이 과정을 통해 기억은 회상 가능한 상태로 굳어진다. 문제는 이 성숙이 언제 시작되고 무엇에 의해 조절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기억 형성 과정에서 새롭게 합성되는 단백질에 주목했다. 단백질은 신경세포의 구조와 기능 변화를 직접 이끄는 물질로, 언제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기억의 성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학습 시점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시간대에 단백질 합성을 억제했다. 그 결과 학습이 끝난 뒤 단백질 합성을 막았을 때는 기억 회상이 유지됐지만, 학습이 이뤄지는 순간을 포함한 초기 단계에서 단백질 합성을 차단했을 때는 기억이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기억저장 세포에서도 차이가 분명했다. 정상적인 경우 학습 후 신경세포 간 연결이 강화되는 시냅스 변화가 나타났지만, 초기 단계에서 단백질 합성이 차단되면 이러한 변화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기억의 운명은 학습 직후 아주 짧은 시간창(time window)에서 결정되고 있었던 셈이다.


기억을 키우는 호르몬이 따로 있었다[과학을읽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픽사베이 제공
'키 크는 호르몬'이 기억을 만들다

연구진은 이 초기 단계에서 합성되는 단백질 가운데 성장호르몬이 학습 직후 해마에서 빠르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성장호르몬은 무작위 신경세포가 아니라, 학습 당시 활성화된 기억저장 세포에 선택적으로 나타났다.


성장호르몬의 역할을 직접 검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성장호르몬의 신호 전달을 방해하는 변이체를 해마 신경세포에 발현시켰다. 그 결과 단백질 합성을 억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억저장 세포의 시냅스 강화가 나타나지 않았고, 학습한 내용을 떠올리는 행동도 감소했다.


반대로 기억 형성이 억제된 상태에서 외부에서 성장호르몬을 주입하자, 기억저장 세포의 구조적·전기생리학적 특성이 일부 회복됐고 기억 회상 행동도 되살아났다. 성장호르몬이 기억 형성 과정의 '부수적 신호'가 아니라, 기억저장 세포 성숙을 직접 조절하는 핵심 인자임이 입증된 것이다.


기억 연구의 틀이 넓어졌다

이번 연구의 의미는 단순히 새로운 분자를 하나 추가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동안 기억 연구는 신경전달물질과 시냅스 변화에 집중돼 왔고, 호르몬은 주로 신체 기능 조절의 영역으로 분리돼 다뤄졌다.


강봉균 단장은 "이번 연구는 신체 성장 조절 인자로 알려진 성장호르몬이 기억저장 세포의 기능적 성숙을 직접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기억 형성을 이해하는 신경과학적 틀을 확장하는 계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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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은 앞으로 성장호르몬이 세포 내부에서 어떤 신호 경로를 통해 시냅스 변화를 유도하는지, 또 기억 형성 초기 단계에서 함께 작동하는 다른 조절 인자들은 무엇인지 규명할 계획이다. 기억은 더 이상 '시냅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장의 신호가 기억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복잡한 연결고리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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