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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꿔봐요] "안전관리는 책상머리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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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시각


[이제 바꿔봐요] "안전관리는 책상머리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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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건설회사에 근무할 당시 제일 긴장되었던 시기는 안전담당 임원을 맡은 몇 년간으로 기억합니다. 지난 경험을 토대로 건설현장의 안전사고와 관련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는 몇가지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지하철 건설공사 현장에서 대형 사고가 났습니다. 인명이 희생된 이 사고의 대응 절차를 관계법령 등에 따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망자가 3명 이상 발생했으므로 ‘중대한 건설사고’에 해당된다. 이에 건설공사 참여자는 발생사실을 지체없이 발주청 및 인허가기관의 장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발주청과 인허가기관의 장은 그 내용을 즉시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국토교통부 장관, 발주청 및 인허가기관의 장은 건설현장에서 사고 경위 및 사고 원인 등을 조사할 수 있다.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건설사고조사위원회로 하여금 사고의 경위 및 원인을 조사하게 할 수 있다. 시설안전공단은 사고발생 후 초기현장조사에서 건설사고조사위원회 구성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위원회 설치가 필요치 않으면 국토부에 보고하고, 필요시에는 장관승인을 받아 위원회를 구성한다.

개정된 건설기술진흥법에 따라 작년 3월9일 200명의 인재풀로 구성된 ‘건설사고조사위원회’가 시설안전공단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올 1월5일 건설현장 안전관리를 '대응형이 아닌 예방형'으로 바꾸는 '건설기술진흥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이 개정안은 5월19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절차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고 후 대응은 일관되지 않았습니다. 사고 내용은 공식적인 단일 창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찰이나 소방당국, 발주처, 건설업체, 국토부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이들한테서 확인돼 쏟아져나온 기사에 의하면 산소통의 호스 방치, 안전일지 조작 등 예고된 인재였다고 합니다. 사고 당일부터 2~3일간 국토부 장관, 국민안전처 장관, 도지사, 시장, 야당 대표, 경찰서장 등이 다녀갔습니다.


사고가 발생한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갑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다른 큰 뉴스가 많아 이 사고 소식은 잠잠합니다. 야당의원들의 모임인 을지로위원회에서는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해 원청에게 책임을 묻는 내용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겠다는 소식이 그나마 들려옵니다.


◆'안전이 제일'이라지만 실제로는…= 1994년 10월 성수대교에 이어 이듬해 6월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습니다. 그러자 국회의원의 발의로 관련기술자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불행하게도(?) 명이 짧았습니다.


그간 정부와 건설회사들은 안전재해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몇년 전 대형그룹 소속 건설회사에서는 세계 최고의 안전전문가를 영입한 후 안전시스템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고용노동부 장관이 주재하는 건설사 대표 조찬회에서 특강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기대와 다르게 매우 원시적인 재해가 계속되고 있고, 관리적 측면에서는 예방보다는 사후대책에 급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다보니 정부에서는 안전업무를 맡으려 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국토부 내 안전관리 담당부서가 공무원들의 '기피순위 1번'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건설사고 조사업무를 위탁받은 한국시설안전공단은 공공기관 경영실적평가에서 최하위인 E등급을 받아 사기가 바닥이라 합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정부가 '안전제일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법규를 강화하면서 업무는 폭주하는 반면 예산인력에 대한 재정당국의 협조는 쉽지 않다고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원칙 '안전관리 핵심은 현장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안전관리의 핵심은 현장에 있습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잘 안 지켜질 수도 있습니다.


안전사고 원인의 절반이 매우 원시적인 형태인데도 반복되는 이유는 예지(豫知) 절차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번, 작업 전 위험예지훈련(Tool Box Meeting)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잘 만들어진 법규나 시스템, 그에 대한 관리자 교육 같은 것이 길을 닦는 것이라면, 현장 제일선의 당일 작업자들에 대한 맞춤형 예지훈련은 그 길 위에서 차를 모는 것과 같습니다.


작업자들이나 관리자들의 뇌리에는 이 예지절차가 형식이 아니며 대충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히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지훈련의 최고 전문가이자 책임자는 직·반장, 또는 십장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장교가 아무리 좋은 전략을 짜더라도 하사관들이 전투를 잘못하면 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사고에서 직전날 작업이 끝나고 산소통의 호스를 정리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면 그 일차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분명히 밝히는 것에서부터 조사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직상 그 윗선의 관리자들이 법규나 시스템상의 절차대로 관리했는지 역시 책임을 묻는 포인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는 보고자, 의사결정자, 집행자, 지시자 등이 분명해야 합니다. 또 가급적 의사소통 창구는 한 곳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의 법규를 보면, 사건 발생을 인지한 첫 보고자인 ‘건설공사 참여자’란 누구이며 어디에 보고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발주청, 인허가기관의 장, 국토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라고 규정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누가, 언제 의사결정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원칙도 있습니다.중복도 하지 말고 누락도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더라도 모두에게 책임을 지우는 법은 그 자체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제 바꿔봐요] "안전관리는 책상머리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미군의 기초야전교범(FM) 핸드북

세번째는 일선작업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당일 작업의 안전관련 교재(FM)를 공급하고 그대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에 발간된 미군의 기초야전교범(Basic Field Manual·사진)은 군인으로서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적어놓은 것으로 학력이나 역량에 관계없이 똑같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건설현장도 여러 공종의 작업자들이 연령이나 학력 등에 관계없이 단기간 모여서 일하는 곳이므로 군대의 FM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나 산하기관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안전관련 가이드북이나 지침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곳에서 많이 만들다 보니 현장에서 골라 쓰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따라서 현장의 공사담당이나 안전책임자는 그중에서 어떤 것이 오늘 공종에 적합한가를 잘 골라서 현장에 전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요즈음 국내 현장에 많이 투입되는 고령자들에게 작은 글씨로 작성된 설명서를 나누어 주거나, 외국인들이 일하는 작업장에 한글로 된 안내판을 게시하는 것은 도움이 안됩니다.


◆세계 최고 재난전문가의 충고를 참고해야= 네번째는 재해가 발생하면 재해의 규모에 따라 조직을 만들고 창구를 일원화해야 합니다. 부상자 의료, 현장보존 및 복구, 재해조사, 유가족 보상, 홍보 등 담당자 별로 기능을 부여하고 권한을 줘 관계자들이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전적으로 그들을 믿고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재난전문가인 기슬리 올라프슨은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려면 5명의 10대 아이를 가진 부모가 되어보라”고 합니다. 또 사고 현장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재해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해서 오라고 충고합니다. 정치가가 나타나면 구조활동을 망친다고 하는 걸 보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다섯째는 '큰집에서 책임지라'는 사회풍토가 오히려 왜곡된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현재 운용되는 법령들의 바탕에는 '약자 보호'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품앗이의 좋은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무척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이 약자로 하여금 비자주적이고 의존적 사고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발주자, 원청자, 하청자, 작업자가 각자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모르고, 각 주체간에 형평을 잃으면 안전사고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정부나 건설회사, 작업자, 언론 모두 어른스러워져야 합니다. 일선 작업자들의 의식구조도 변해야 합니다. 또 국민들은 안전에는 비용이 따르고, 그 비용은 세금에서 나오며, 내가 낸 세금은 내가 지킨다는 주인 의식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전문건설업체(Specialty Contractor)에게 외주를 주는 것은 그 업체가 그 공종의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공종의 위험요소를 모르면 전문가가 아니지요. 안전 떼고 외주를 주는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안전의 외주화’가 아닙니다. 외주는 안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 국토부 장관이나 안전처 장관께서는 항상 관용차 안에 현장 안전장구를 갖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건설회사 대표 시절 그렇게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VIP오시면 브리핑은 물론 귀빈용 안전모, 안전화, 의전용 흰 장갑 등을 준비하는데, 이게 다 가욋일들입니다. 그 정도 배려해주는 것만으로도 현장직원들은 현장복구에 더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Show must go on)"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본분을 잊지 않고 침착하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얘기겠지요. 발주자와 원청자, 하청자, 작업자 모두가 FM대로 움직인다면 난관이 생겨날 리 없고,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훌륭하게 극복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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