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 바람이 거세다. 이합집산(離合集散) 변화의 바람이다. 삼성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산업재편의 바람이다.
삼성그룹은 최근 한화ㆍ롯데와 연이어 빅딜을 성사시켜 화학과 방산사업 정리를 끝냈다. 삼성은 지난해 시작한 사업재편을 통해 정보기술(IT)ㆍ전자, 바이오와 금융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롯데는 삼성SDI 케미칼 사업 부문, 삼성정밀화학을 인수함으로써 사업 포트폴리오를 유통과 화학 두 축으로 재편했다. 한화는 삼성 테크윈 등 방산회사를 인수함으로써 방산 분야 최강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여기에 코웨이와 현대카드ㆍ캐피탈 지분, ING생명, 대우증권, 한국항공우주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매물로 나와 있어 인수합병(M&A)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 같은 기업 간 자율 빅딜, M&A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주목을 끈다. 첫째는 사업재편이다. 대기업들은 기존 사업의 전문화 혹은 수직계열화, 새로운 성장동력의 확보를 위해 필요한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기업의 추격이 거세 재편은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 됐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말 기준으로 중국 스마트폰시장에서 화웨이, 샤오미 등 중국 기업들에 밀려났으며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거센 추격을 당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역시 올 들어 9월 말까지 중국시장 내 누적 판매량이 중국 창안자동차에 밀려 2009년 이후 처음으로 6위로 추락했다. 한국과 한국기업들은 앞에서는 미국의 애플이 상징하는 선진기업에 막히고, 뒤로는 중국의 샤오미가 대변하는 후발 기업들의 추격을 받는 신세가 됐다.
둘째는 오너들이 직접 나서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재벌 기업에서 조단위 규모 투자를 결정할 사람은 오너밖에 없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이 없었다면 최근의 대규모 빅딜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부회장은 2013년부터 삼성 내에서 이뤄진 계열사 합병을 주도했고 최근 롯데ㆍ한화와의 빅딜을 성사시켰다. 신 회장은 2004년 이후 14년간 11조를 들여 37개 기업과 지분을 사들이며 회사 덩치를 키웠다. 김 회장은 삼성테크윈, 탈레스 등을 사들여 화약제조에 특화된 한화를 방산 전문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셋째 정부 차원의 한계기업인 '좀비기업' 정리와 맞물려 한국 산업구조를 바꿀 계기라는 점이다. 이번 빅딜로 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는 '레드오션'에서 서로 생존하는 '블루오션' 즉 전문 분야로 특화하는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철강 등 주력 제조업이 중국에 추격당할 가능성이 매우 커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이합집산의 전략만으로 샌드위치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과제는 이뿐이 아니다. 사물인터넷(IoT), 자율ㆍ전기자동차 등 융복합산업과 바이오 등 기술집약 산업으로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는 선진국들을 쫓아가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이럴 때 일수록 재계 수장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무만을 보지 않고 숲을, 숲을 넘어 산과 산맥을 볼 줄 아는 긴 안목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세계적인 저성장과 중국의 추격이라는 거센 파도가 치는 황해(荒海)에서 한국 경제를 난공불락의 배로 만들어 안전한 항구로 안내하는 노련한 선장이 필요하다. 통신기기를 컴퓨터기기로 바꾼 아이폰을 만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최빈국 한국에 제철산업을 일으킨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이건희 삼성 회장 같은 인물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영감을 준 비즈니스 지도자들이었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산업의 물꼬를 터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를 일신시킨 주역이었다. 그렇기에 한국 간판 기업들의 '키'를 잡은 오너들도 그런 DNA를 물려받았기를 바란다. 그들처럼 스스로 10년, 20년 뒤의 한국 산업지형도를 그리고 조직원들을 자극하는 영감을 주고 있는지 자문자답하길 당부한다.
박희준 논설위원 jacklon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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