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남쪽 키웨스트는 미국 최남단 군도의 맨 끝 섬으로 쿠바와 불과 150km 떨어져 있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아침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낚시하고 밤에는 바에서 술 한 잔 걸쳤던 곳이다. 섬들이 점점점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그 중에 세븐마일브리지라는, 이름 그대로 아주 긴 다리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예전에 놀러갔을 때 이 다리를 건너게 됐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차들이 너무 느긋하게 달려서 답답했다. 탁 트인 시야로 까마득한 섬까지 경찰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데 제한속도보다 한참 느리게 점잖게들 달리고 있었다.
종종 그 때의 느낌을 수업시간에 '정치적 정당성'의 예로 든다. 왜 그런가 하면 정치적 정당성이란 집단적 선택이나 규칙에 대해 사람들이 그걸 옳다고 믿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찰차가 안 보여도 속도를 지킨다면 시속 얼마로 정해놓은 그 집단적인 속도제한은 정당성이 높은 규정이다. 반대로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꾸 과속에 걸려든다면 그 속도 규정에 불만이 있는 것이다. 즉 집단적 규정이긴 하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보니 잘 안 따르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정당성은 부모의 권위에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최근 열린 서울디지털포럼에서 '디지털시대 부모 되기'라는 세션에서 청소년들의 디지털 과몰입 현상을 다루었는데 학부모-자녀 1000쌍을 조사한 동료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말이 맞다고 여길수록 디지털 활동 간섭이나 통제에 대해 자녀들의 불만이 적다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정당성은 정책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자꾸 속도 규정을 위반하면 순찰차들이 더 많이 도로에 포진해야 할 것이고, 자녀가 자꾸 부모와의 약속을 어기면 당근을 주든가 채찍을 치든가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정당성이 낮은 정책은 정책 목표 대비 자원 투입이 큰 고비용의 정책이다.
사실 정치적 정당성은 그 내용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거나 그르다고 '믿는' 일종의 심리적인 현상으로, 그 믿음의 원천은 다양하다. 예컨대 정치 지도자가 나라의 정책을 잘 펴서 경제도 나아지고 살기 편해졌다고 '믿는다면' 그 지도자의 정당성은 성과에서 나오는 것이다. 박정희나 리관유가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 불리는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처럼 지도자의 개인적 자질이나 도덕성이 정당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제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정치 지도자들은 성과보다는 그 개인의 카리스마로 대중의 마음을 얻어낸 경우가 많다. 성과보다 이렇게 인간적 신뢰에 기반한 정당성이 의외로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능력이 뛰어난 상사라도 인간적으로 싫으면 그 상사 말이 옳아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치를 생각해보라.
흔히 과학기술정책을 같이 붙여 얘기하지만 과학정책은 기술정책과 많이 다르다. 시장의 상품과 서비스로 이어지기 쉬운 기술은 그 정책의 정당성이 주로 경제산업적 성과에 기반하나 당장 먹고사는 것과 거리가 먼 과학은 그 정책의 정당성이 가시적인 성과에 기반하기 어렵다. 즉 정부든 기업이든 기술개발 투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반면, 언제 뭐가 나올지 모르는 과학 연구에 돈을 붓는 것을 정당화하려면 한참 설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변호사ㆍ의사처럼 잘 나가는 직업보다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이는 과학 정책의 정당성이 성과보다는 과학의 가치에 대한 믿음, 과학자들의 진실성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을 반증한다. 혹자의 말처럼 기술은 경제이나 과학은 문화인 것이다. '묻지마 투자'는 위험하지만 '묻지마 연구'는 괜찮다. 괜찮을 뿐만 아니라 나름 더 생산적일 수 있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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