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K허친슨, 파나마운하 항구매각 보류
中·서방에 걸쳐진 사업…양자에 낀 CK
최근 파나마 운하 항구 운영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홍콩 재벌 리카싱 회장이 양국의 압력 속에서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리카싱이 이끄는 CK 허친슨 그룹은 파나마 운하 항구 2곳의 운영권을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에 매각하려 했으나, 중국 정부의 강력한 압박으로 최종 계약 단계에서 보류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비즈니스 거래를 넘어 글로벌 해양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치열한 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CK 허친슨은 4월 2일 파나마 운하 항만 시설 2곳의 운영권을 블랙록에 매각하기로 하고 최종 계약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계약 보류를 선언하며 전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회사 측은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중국 정부의 강력한 압력이 배경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시장 규제 감독 기관인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은 계약 성사를 앞두고 반독점 거래 여부를 점검하겠다고 나서며 사실상 계약 진행을 방해했다. 특히 홍콩 내 친중 매체인 '홍콩 대공보'는 3월 중순부터 리카싱 일가를 향해 "돈 앞에서 대의를 잃고 조국과 민족, 중국인 전체를 배신했다"는 강도 높은 비판 기사를 연이어 게재했다.
이러한 중국 당국의 홍콩 기업인에 대한 강력한 압박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파나마 운하 항구 매각 관련 내용이 시진핑 주석에게 보고되었을 때 크게 분노했다는 후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리카싱 회장이 애초에 자발적으로 매각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계약에 나섰다는 점이다. 현재 97세인 리카싱 회장은 미중 양국의 압력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리카싱 회장과 CK 허친슨 그룹이 미중 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룹의 사업 구조 때문이다. CK 허친슨은 해운·항만 사업뿐 아니라 통신, 인프라, 소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국가에 진출해 있는 대형 그룹이다. 이 기업은 리카싱 회장이 홍콩에 세운 최대 기업 중 하나였던 청쿵 그룹과 2015년 인수한 영국계 항만 회사 허친슨 완포아를 합친 그룹으로,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기업들과는 달리 서방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리카싱 회장 자신은 중국 본토 출신이지만 현재는 홍콩과 캐나다 국적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2019년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 당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시진핑 정권과는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K 허친슨의 본사는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고, 청쿵그룹 산하 계열사들은 중국 본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해운 사업이나 텔레콤, 인프라 사업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많이 진출한 상태여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이 파나마 운하 항구 운영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그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파나마 운하 전체의 통제권을 다시 가져오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미국은 중국이 유사시 파나마 운하 통제권을 쥐게 되면 미국 동부 본토에 배치된 군사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없게 된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도 파나마 운하는 미국과 미군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대서양 함대와 태평양 함대가 임무를 교대하거나 작전 지역을 변경할 때 자주 이용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해군의 이동이 전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이므로 파나마 정부는 통행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중국 정부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완전히 장악할 경우, 일대일로 사업의 일환으로 전 세계 여러 지역에 임대한 항구들을 하나둘씩 빼앗기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국의 무역선 이동이 차단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미국 정부가 파나마 운하 항구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중국 정부나 기업이 소유한 항구 운영권을 모두 매입하려 할 경우, 중국의 무역로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
현재의 긴장 상태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 출범하고 시진핑 정부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이는 상황에서 자존심 싸움이 벌어질 수 있지만, 결국 누군가는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의 고민은 홍콩 당국이 리카싱 회장과 블랙록의 합의점 도출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강력하게 개입하여 계약을 무산시킬 경우 홍콩에 남아있는 외국계 투자 자본과 투자 은행들이 홍콩을 떠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19년 국가보안법 강행 통과 이후 많은 기업들이 홍콩을 떠났으며, 중앙 당국의 명령에 따라 기업들의 자유로운 거래와 계약이 방해받는다면 남아있는 기업들도 홍콩을 등질 수 있다. 이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려는 중국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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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트럼프 행정부 역시 국내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세 협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미국 물가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추가 관세 부과도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면 얻을 것이 없다는 계산이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측이 표면적으로는 강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만큼 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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