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판 중대재해법 '책무구조도' 올해 본격 시행
책무구조도 도입 이후 금융권 고위 임원들 불안 커져
"과도한 규제로 실효성 부족 VS 금융사고 예방 가능성 높다"
#시중 은행 고위 임원 A씨는 올해 들어서 전국의 지점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매일 보고 받는 중이다. 책무구조도를 도입하면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작은 지점에서 벌어지는 1000원 단위의 작은 계산 착오 문제까지 본인에게 책임이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라 신경 써야 할 일이 배로 늘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 B씨는 최근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날 때마다 책무구조도와 관련된 하소연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이런저런 업무가 많이 늘었고, 언제든 소송당하고 회사에서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는 불만이 대부분이다. CEO는 물론 최고위험관리자(CRO), 최고재무관리자(CFO) 등 C레벨 경영진들의 고충을 듣는 경우가 늘었다.
올해부터 금융권 책무구조도 도입이 본격화하면서 제도를 둘러싼 업계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안 그래도 제약이 많은 금융업에 또 다른 규제가 생기면서 제도의 실효성은 떨어지는데 경영 부담만 커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책무구조도 도입이 대형 금융사고 예방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금융사 본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금융사 올해 최대 목표는 "내부통제 강화"
8일 금융업계 올해 경영 전략을 분석한 결과, 금융사 CEO들의 최고 관심사는 내부통제 강화다. 올해 금융지주와 은행을 시작으로 금융권에 책무구조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내부통제에 더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책무구조도(responsibilities map)는 금융회사 각 임원이 담당하는 직책별로 책무를 배분한 내역을 기재한 문서다. 임원 개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내부통제 대상 업무의 범위와 내용을 금융회사 스스로 특성을 고려해 사전에 명확히 하는 것이다. 금융권 내부통제 강화를 위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작년에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도 시작됐다.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담당 임원들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어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면서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은 올해 들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임직원들에게 내부통제 강화를 강하게 주문했다.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지난달 26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신한에서 내부통제 체계가 보다 실질적으로 구동할 수 있도록 관리감독, 모니터링 체계 전반을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 회장은 연초 신년사에서도 내부통제 강화를 주문한 데 이어 주총에서 다시 이를 언급한 것이다.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도 같은 날 주총에서 "내부통제 관련 제도와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체계 전반을 혁신해 모든 영업과 업무 과정에 내부통제가 효율적으로 녹아들어 원활히 작동하도록 하겠다"며 "반드시 신뢰받는 우리금융그룹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이찬우 NH농협금융지주 회장도 내부통제 강화를 올해 주요 경영 목표로 삼았다.
금융지주 수장들의 이런 내부통제 강화 의지에도 실제 내부통제 업무를 담당하는 금융사 임직원들의 불안감과 불만은 여전히 크다. 늘어난 업무와 징계에 대한 부담,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 등이 공통적인 불만 사항으로 꼽힌다.
시중은행 임원 C씨는 "작년부터 책무구조도 도입을 준비하면서 내부통제와 관련된 업무가 두 배 이상 늘었다"며 "최선을 다해 내부통제를 했음에도 부당대출이나 횡령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C씨는 "대형 금융사의 경우 인력과 자금이 충분하지만 중소형 금융사는 여력이 부족해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화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도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책임자 처벌 강화가 실제 금융사고를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실효성 논란도 있다. 현실에서는 책무구조도를 '감사를 위한 문서' 수준으로만 만들고 실질적인 책임 구분이나 개선은 이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업무는 융합적이고 유동적인 경우가 많은데 단순한 책무구조도만으로 책임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한 우려도 있다. "책무구조도에 내 역할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오태록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책무구조도 도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금융회사와 당국 모두 실무적 차원에서 풍부한 논의를 이어 나가야 한다"며 "특히 CEO가 조직 전체에 내부통제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위험요인을 세부적으로 인식하며, 필요한 실질적 자원을 투입하는 단계까지 이어져야 도입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초기 혼란 겪겠지만, 장기적으로 금융사고 예방할 것"
도입 초기인 만큼 당분간 현장에서 여러 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형 금융사고 예방과 소비자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면서 책임소재가 명확해지고, 내부통제 시스템 강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특히 CEO를 비롯한 경영진의 관심과 참여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고위험 금융상품 판매나 불완전판매 등의 리스크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금융사 임원들의 관련 업무에 대한 내부통제 책임이 명확히 규정되고, 모든 임원이 내부통제를 자신의 업무로 인식하도록 하는 등 근본적인 금융권의 내부통제 행태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통해 소비자보호는 물론 금융사 건전성 관리 등 모든 영역에서 금융회사의 본업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오 연구위원은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CEO까지 내부통제에 대한 책임이 강화됐고 주요 업무별 최종책임자를 특정해 내부통제 책임을 하부로 위임할 수 없도록 하는 원칙을 구현했다"며 "이는 금융사고에 대한 책임소재를 더욱 명확히 하고 관리 의무 이행 실패의 책임을 경영진에게 직접 물을 수 있게 돼 임원의 책임 회피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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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통제 관리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경우에는 임원들이 제재나 징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내부통제 등 관리의무를 이행한 경우에는 내부 통제 등 관리의무 위반에 따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며 "책무구조도가 자신의 책임을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에 평소에 업무 수행을 잘했으면 오히려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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