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쟁터의 시간, 52시간에 갇히다]
②AI 기업 30곳 설문조사
83.3% "획일적인 주52시간제 개선 필요"
국내 AI 기업 10곳 중 8곳은 주52시간 근무제가 AI 개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판단했다. AI 업계는 획일적인 주 단위 근무 시간 관리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AI 기술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속도를 늦추는 주52시간제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시아경제가 지난 8~12일 서울 양재 AI특구 기업들을 대상으로 주52시간 근무제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응답한 30개 기업 가운데 24곳(80%)이 현행 주52시간제로 인해 업무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답했다. 지장이 없다고 답한 기업은 6곳(20%)에 불과했다.
AI 업계 관계자는 "혁신 산업은 업무량이 일정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따라 몰입도가 크게 달라진다"면서 "새로운 서비스 개발 시점에는 집중 근로가 필요하고 이후에는 여유가 생기는 구조다. 그런데 주52시간제는 이러한 업무의 비선형성을 반영하지 못해 결과적으로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꼬집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 기업의 63.3%는 주52시간제를 지키지 못하고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AI 스타트업을 3년째 운영 중인 박주영(37·가명)씨는 "어떻게든 제도를 피해서 일하려다 보면 결국은 집에 가서 일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면서 "실제로는 업무를 수행했지만, 일했음을 정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초과근무를 하는 이유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개발 업무 몰입'이 56.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프로젝트 마감 기한을 지키기 위함'(36.7%), '미국 유럽 등 시차가 있는 나라와의 협업'(6.7%) 등의 순으로 높았다. 상사의 업무지시로 초과근무를 했다는 답변은 한 건도 없었다. AI 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처럼 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근무시간 제한을 하는 것은 성과지향 근로자들에게는 맞지 않는다"면서 "몰입 중에 강제로 퇴근해야 하는 구조로 인해 업무 효율은 저해되고 기업 역량은 도태된다"고 지적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AI 기업 83.3%는 주52시간제가 개선돼야 한다고 답했다. 52시간제의 문제점으로는 ▲급변하는 상황 대처 미흡(30.0%) ▲기술 개발 속도 저하(23.3%)▲몰입 및 연속적 연구 어려움(20.0%) 등을 지적했다. 인건비에 대한 부담(6.7%)으로 작용한다고 응답한 기업도 있었다.
반면, 52시간제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한 기업들은 그 이유로 '충분한 인력 보유'(50%)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익명을 요구한 AI 관계자는 "초과근로 관련 추가 임금을 지급하고 있으면서도 기술력이 생존의 최우선이 돼야 하는 스타트업은 상당한 부담과 책임 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자발적으로 근무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려는 구성원들도 법이 허용하는 근무시간 때문에 의지가 꺾이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설명했다.
최근 AI 스타트업 업계는 해외로 법인을 옮겨 운영하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다. 국내 AI 스타트업 대표들은 그들이 '부럽다'고 했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 볼 사람, 주 80시간 근무를 함께 해보자는 공고가 꽤 많이 올라온다"면서 "밀도 높게 일해야 혁신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표로서 그런 말을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AI 스타트업을 10년 가까이 운영해 온 김모씨는 "해외에서 일하는 원격근무자라 하더라도 국내 법인 소속이다 보니 주52시간제로 인한 초과근무 이슈가 생긴다"면서 "월급으로 억대 연봉을 주고 있지만, 소송 제기 등 추후 문제가 제기될 수 있어서 주말에는 일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은 AI 인력 관리를 위해 다양한 복지제도를 운영한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AI 연구소 관계자는 "주52시간제에 묶여 연봉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기에 회사에서 대신 건강 관리를 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하는 등 별도의 관리를 하고 있다"면서 "연구개발직은 저녁에 출근하기도 하는 등 확장된 유연근무 제도를 적용한다"고 말했다.
AI 업계는 주52시간제를 넘어선 초과근무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근로자의 자발성을 우선시해야 하며 동시에 근로자가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충분히 보장해주기를 바랐다. 근무 형태 결정을 가급적 기업의 자율에 맡겨달라는 것이다. 초과근무 허용시 전제돼야 하는 필수 조건으로 ▲자발적인 동의와 선택을 위해 근로자의 초과근무 거부권 보장(40%)이란 답변이 가장 많았다. 이어 ▲일한 만큼 보상받는 비포괄임금제 도입(20%) ▲일정 시간 근무 후 강제 건강검진 실시 등 건강권 보장(20%) ▲남용되지 않도록 고용노동부 철저한 관리 감독(10%) 등이 제시됐다. 기타 의견으로 '고용주와 노동자 간 합의만 있으면 되도록 해달라', '자율에 맡겨달라'는 답변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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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업계 인사 담당자는 "해외 기업들은 성과 보상이 확실하기 때문에 일을 더 열심히 하려는 사람들만 남아 결국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면서 "반면 국내 현장에서는 실무자와 경영진 사이에서 초과근무와 관련된 갈등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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