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女力이 國力이다 - 10대 과제 집중 조명
직장 내 시선·루머 등 2차피해 더 고통
엉뚱한 트집잡아 피해자 부당징계도
처벌수위에 관대한 사회인식 변해야
여성임원 많아지면 성 관련사건 줄어
#1. 공기업에 다니는 A씨는 지난해 차장과 단 둘이 해외 교육에 참가했다 성추행을 당했다. 회사 측은 해외교육 직후 두 사람 모두 해고했다. 가해자의 경우 A씨에 대한 성희롱이 해고 사유였고, A씨는 3주 일정 가운데 2주가량이 개인적인 일정이었다는 이유였다. 사내에선 "A씨가 해외교육 징계를 성추행건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유혹해서 돈을 요구했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았다. A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부당해고 진정을 넣은 끝에 복직됐지만 여전히 따가운 시선을 견디고 있다. '가정 파괴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다닌다.
#2. P(30)씨는 지난해 여름 외근 중에 직장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두 달 만에 스스로 사표를 썼다. 성폭행 직후 경찰에 신고하면서 가해자가 해고됐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해고 뒤에도 프리랜서로 자택근무하다 두 달 만에 다시 복직됐다.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P씨의 항의는 '회사 밖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피해자가 감당해야 한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 측에선 P씨가 가해자 얼굴을 마주하기 무서워 사직 의사를 밝힌 뒤 출근하지 않은 기간을 '무단결근'으로 처리해 연차수당까지 깎았다.
성폭력에 시달린 여성 직장인들이 일터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각종 흉흉한 소문과 사내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직장을 떠나거나 부당하게 해고 통보까지 받는 것이다.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취업문을 뚫고 직장에 입성한 여성들은 남성 동료의 무자비한 성폭력에 직장생활이 좌절되고 있다.
◆직장女 고민 절반이 성희롱=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직장 내 성희롱 사례도 늘고 있다. 여성민우회가 최근 펴낸 '2013년 상담사례집'을 보면 지난해 전체 상담 건수 394건 가운데 성희롱 관련 상담은 222건(56.3%)을 차지했다. 2012년 성희롱 상담비율 44.64%(125건)보다 12%나 증가한 것이다. 성희롱 상담 건수는 2010년 187건에서 2011년 86건으로 대폭 줄었다가 2012년부터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노동부에 접수된 성희롱 신고 건수도 2012년 249건에서 지난해 379건으로 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고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직장 내 성희롱을 범죄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된 측면도 작용했다.
문제는 성희롱 사건을 신고한 여성들이 2차 피해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화되면서 성희롱 피해자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직장에서 잘려나가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이 대표적이다. SBS 시사프로그램 '현장21'을 통해 전파를 탄 이 사건은 르노삼성의 부당한 성희롱 처리 과정이 드러나면서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10년차 과장인 30대 중반의 김미정(가명)씨는 1년간 팀장의 성희롱에 시달리다 신고한 뒤 오히려 징계를 받았다. 가해자인 팀장은 '2주 정직'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반면 피해자인 김씨와 신고를 도운 여성 동료는 대기발령과 함께 회사로부터 기밀 유출 혐의로 고소까지 당했다. 김씨는 성희롱 신고 이후 '꽃뱀'이라는 루머로 시달렸다. 성희롱 사건 후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이 총망라된 경우다.
현행법에선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처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자에게 고용상 불이익을 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해 처벌 수위기 가장 높다. 하지만 르노삼성의 경우처럼 엉뚱한 트집을 잡아 부당한 징계를 하는 비율은 상당하다. 민우회 성희롱 상담사례 가운데 35.9%(79건)가 불이익 조치를 호소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사업주가 남녀고용평등법을 악용하는 맹점이 있다"며 "근태 등 다른 이유로 징계할 경우 부당징계를 밝혀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자가 직장에서 못 버티는 또 다른 이유는 가해자를 감싸는 사내 분위기다. 성희롱은 주로 직장 내 남성 중견간부가 여성 신입사원이나 계약직 여사원 등 약자에게 행한다. 성희롱이 권력관계에서 이뤄지는 만큼 이를 거부하기도 어렵지만 밝히게 될 경우 껄끄러운 직장생활을 견뎌야 한다. 특히 직장 동료들은 피해자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소문을 유포하는 등 피해자를 왕따 시켜 구석으로 몰리게 하는 사례가 많다.
◆女임원 늘면 성희롱도 줄어= 성희롱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선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실제 외국에선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기업의 이미지가 추락해 매출이 직격탄을 맞는 만큼 성희롱 사건에 민감하게 대응한다. 2010년 미국의 컴퓨터 제조업체 휼렛패커드(HP)의 최고경영자(CEO)였던 마크 하더도 과거 하도급 업자가 자신과 회사를 상대로 성희롱 의혹을 제기하고 조사가 진행되자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외국계 기업인 한국존슨앤드존슨의 황영미 상무는 "개인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특히 강조하는 기업문화라 성희롱에 대한 문의조차 없다"면서 "성희롱 교육과 별도로 매년 시행되는 문화교육이 (성희롱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성희롱에 대한 처벌이 관대하다. 수년 전 '여대생 성희롱' 파문을 일으켰던 강용석 전 국회의원은 의혹 제기 직후 소속 한나라당(現 새누리당)에선 제명됐지만 18대 국회 임기를 끝까지 채웠다. 현재는 케이블방송에서 종횡무진하며 제2의 인생 황금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5월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도중 인턴직원을 성희롱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사건 직후 사퇴하긴 했지만 '대통령 순방 중 성희롱'이라는 전대미문의 국제적 망신을 초래한 것이 직접적인 낙마 이유였다.
무엇보다 여성 임원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 대표가 이끄는 회사의 경우 성희롱 사건도 적을 뿐더러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엄격하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콘텐츠 보안 솔루션 전문 업체 디지캡의 이도희 대표는 "성희롱이라는 것이 권력관계에서 이뤄지는 만큼 직장에 많은 여성 상사들이 채용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