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현준 기자] 재소자들은 죄질과 수형태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S1~2급은 몸만 갇혀있을 뿐 가족도 만나고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지만 S3~4급은 치열한 감시아래 일거수일투족에 제약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재소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특히 사회적 명사들은 교도소 안에서 자살을 하기도 하고 교도관들에게 집착해 반항을 일삼기도 합니다. 평생 쌓아올린 이름이 무너져서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그런 자기학대가 식사거부와 수면거부 등으로 이어지고 교도소안의 작은 수렁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이런 재소자들이 행여 '사고'를 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체험을 간다하니 낭만적인 요구사항을 들이민 동료기자도 있었습니다. 영화처럼 숟가락 하나로 탈옥이 가능한지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습니다. 춘천교도소는 'ㄷ'자형인데 밖으로 나오니 큰 운동장이 있고 외곽에는 영화처럼 감시대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경비교도대가 감시하던 곳인데 지금은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습니다. 3~5m높이의 연녹색 펜스가 설치돼 있어 40kg이상 무게가 감지되면 경보음이 울리고 감시 카메라가 자동으로 위치를 따라갑니다.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도 경보가 울리고 운이 좋아 펜스를 타고 넘어도 3m 떨어져 또 담장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편에 달린 CC TV가 움직이는 물체를 감지해서 줌인하고 따라 들어갑니다.
이런 첨단 시설은 교도소 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도관들은 개인카드를 찍고 개인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쇠창살 문이 열립니다. 그 내용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TRS'라는 구형 휴대폰 생김새의 무전기를 갖고 있어 교도소 내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재소자뿐만 아니라 교도관의 일거수일투족도 시간대별로 감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신입 교도관으로 행세한 기자도 각 동을 방문할 때마다 모든 기록이 중앙통제실로 전달됐습니다.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영치금을 가장 많이 가진 자가 왕이었습니다. 많게는 100만원이 넘는 영치금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1000원짜리 과자부터 훈제 닭까지 먹을거리를 사자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가 하기 싫은 재소자는 훈제 닭은 시켜주곤 싫은 일을 떠밀기도 합니다. 신참 교도관이 순찰을 돌 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담당, 제 영치금 잔고 좀 알아봐주세요."였을 정도입니다.
휴게실에서 한 교도관으로부터 들은 경험담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수원에서 여대생을 강간 살인하고 청송교도소에서 징역 7년을 살다 출소한 A 이야기입니다. 출소 후에 그는 개척교회 목사인 형을 찾아가 얹혀 살았는데 청송에서 지내다 왔다며 일도 않고 노닥거렸습니다. 보다 못한 형과 형수가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자 앙심을 품은 A는 바로 다음날 새벽, 집에 침입해 형수를 노끈으로 목을 조른 뒤 밟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경찰에 붙잡힌 A는 '이제 사형 아니면 무기형이구나'고 생각하면서 재판을 기다렸지만 못된 꾀는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좀 더 편한 요양병동에 가고 싶어 요도에 샤프심을 박아 넣는가 하면 탄원서 내기를 반복해 결국 2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안양교도소로 이감되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교도관들아, 20년 후 다시 봅시다. 그 때는 형을 죽이고 다시 들어올테니"
만 24시간이 지난 19일 아침 9시. 함께 선 교도관들에게 한마디 해보라는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교도관들이 이렇게 고생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더니 하루만에 친숙해진 한 교도관이 농담섞인 어투로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하룻밤 자고 교도소 생활을 어떻게 알겠어.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신문사로 들어와 부장이 사준 첫 식사가 궁금하십니까? '순두부' 백반이었습니다.
박현준 기자 hju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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