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충훈 기자] 최근들어 부쩍 '남자의 자격'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 '믿음직하고 튼튼해야한다'는 전통적인 기준외에도 조금 세련된 면을 요구하는 듯하다. 초식남, 짐승남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요리를 잘하는 자상한 남자 혹은 정반대로 숨막히는 야성미를 초콜릿 복근으로부터 뿜어내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한다. '남자의 자격'이란 TV 프로그램을 보니 남자란 중년이되어도 자기 또래의 '그냥' 여자친구를 둬야하며 전자기기도 척척 다뤄야한단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원래 자신의 성격을 감추고 가면을 쓴 채 사는 남자들이 생긴다.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도 자신의 위치와 자격에 대해 고민하는 건 매한가지다.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이라는 '공감 100% 글귀모음'을 보니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애와 개의 공통점이 화가 나면 무섭다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때 혹은 남자의 자격을 의심당할 때 공포 스릴러 영화속의 남자들은 반드시 '개'가되어 적을 물어뜯게 된다.
폭력영화의 거장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원제 straw dogs)은 남자가 가진 본능적인 폭력을 세밀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한 신혼부부가 아내의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주인공 데이비드 섬너(더스팀 호프먼 분)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미국인 수학자로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생활을 보내기 위해 영국의 시골에 오게됐다.
하지만 처음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기분나쁜 경험을 하게된다. 마을 입구의 바에서 만난 남자들이 원인이다. 자기의 아내를 힐끗거리며 기분나쁜 웃음을 짓고 수군대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덕위에 정착한 신혼부부는 이 남자들을 고용해 별채를 짓는 공사를 시작하지만 이 남자들 영 수상하다. 결국 그는 남자들의 계략에 의해 그들과 새 사냥을 나가게 되고 주인공이 집을 비운 사이 인부 두명이 그녀의 아내를 강간한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된 주인공은 사내들을 상대로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주목할 것은 적을 모두 쓰러뜨린 후의 데이비드가 짓는 표정이다. 묘한 만족감에 빠진 그는 온몸이 땀에 젖어 깨진 안경 너머로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폭력 자체를 즐기게 된, 남자가 가장 숨겨야할 본능에 눈떠버린 것이다.
의기소침해진 남자들은 좀비 영화 '독하우스'(dog house, 2009)에도 등장한다. 빈스, 닐, 마이키 등의 주인공 무리는 하나같이 그들의 반쪽으로부터 남편, 남자친구 자격 상실선언을 들었다. 이들은 빈스가 이혼하게 되자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마이키의 할머니가 사신다는 시골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여자가 너무 많아 한사람당 4명을 한번에 사귈 수 있다는 마이키의 허풍에 잔뜩 고무되어 도착한 그곳. 분위기가 어째 수상하다. 여자들만 좀비가 되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다. 알고보니 '고양이집프로젝트'라는 수상한 정부 계획의 실험장소로 이 마을이 선택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여자를 좀비로 만들어 남자 군인들을 공격하게 만드는 계획이다.
마이키의 할머니까지 좀비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남자들은 생존을 위해 여자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 2단계 변신을 통해 지능까지 상승한 여자 좀비들은 초반의 육탄전(?)에서 벗어나 이제는 지력까지 발휘한다. 이 남자들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남자들은 똑똑하고 섹시하기까지한 좀비의 공격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어찌된 일인지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린다. 연인과 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았던 과거지사로 잠시 숙연해졌을 때, 어느샌가 잃어버렸던 '남자의 자격'에 대해 빈스가 한마디한다.
"우린 사람들이 우리에게 원하는데로 하려고 했어. 믿음직한 성숙한 가정적인 사람이 됐어. 그리고 무슨일이 일어났지? 사람들이 우리를 지루해 했어. 모든 여자들이 정말 원하는게 애완동물이라면 왜 빌어먹을 강아지를 사지 않는거야?"
그의 말이 맞다. 앙드레 지드가 "사람은 남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맞춰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했다. 남자는 특히 그렇다. 마이동풍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누군가의 눈치를 끊임없이 보며 그들이 원하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성실한 가장, 든든한 남자친구라는 남자의 자격안에 자신을 가두고 만다.
결국 빈스의 말처럼 '재미없는 남자'가 되어 버려지기 십상이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자격'이란 남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잊어야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광고카피를 따라 하자면 '남자의 자격 그런거 없다.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라는 말이다.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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