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정규방송으로 편성된 전설의 고향은 매주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여름철엔 특히 더했다. 평소보다 한결 공포 수위가 높아진 전설의 고향을 방영하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온가족이 그랬다. 가족 중 특히 겁이 많던 누이는 승려로 변신한 이무기가 길을 가다 홱 돌아보는 장면을 보고 놀라 거의 혼절 직전까지 갔다. 그래도 방송시간만 되면 가족들은 TV 앞에 앉았다. 드라마를 하는 날이면 신문의 '오늘의 방송 하이라이트'를 챙겨보며 공포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설의 고향은 그 특유의 분위기만으로 공포를 줬다. 장중한 시그널, 낭랑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 귀신이 숨어있을 듯한 어두운 화법(畵法)의 산수도, 그위의 흘려쓴 '傳說의 故鄕'이란 글씨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삐걱대는 선풍기를 켜고 방금 목욕했는데도 목덜미에 땀이 차는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서 가족들이랑 보는, 그야말로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이었다.
최근 여름특집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있다. 무섭긴하나 무척 '건조한' 공포다. 진땀이 나올 정도로 무섭지는 않다는 소리다. 매회 어떻게든 무서워야한다는 제작진의 강박이 깃들어 있다. 언제부터 '전설의 고향=공포'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과거 전설의 고향은 무서운 이야기만 했던 게 아니다. 이 프로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지역 민담을 드라마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전의 방송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훈훈한 효자효녀 이야기나 이웃간의 소소한 다툼을 그린 유머러스한 전설의 고향을 떠올릴 것이다. 추정하건데 6 대 4정도의 비율이 아니었을까 싶다. 잔뜩 기대를 하고 봤는데 의외로 싱거우면(?) 다음주를 기다리면 됐다.
예전과 달리 여름한철에만 반짝 방영을 하는 요즘의 전설의 고향은 납량특집인 만큼 무조건 공포로만 간다는 게 판단 미스인 듯 하다. 단음식도 자주 먹으면 물리듯 매번 극한공포로 몰고가려 하니 오히려 재미가 없다. 매주 빠짐없이 귀신이 등장하고 어김없이 누군가 피를 봐야 끝이 난다.
또 제목만 전설의 고향이지 소재는 '한국적'인 공포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것들이다. 드라큐라의 한국판 이야기라 할 수 있는 '혈귀'와 미저리식 스토커 귀신을 다룬 '계집종'은 헐리우드 공포영화에서 모티브를 딴 듯하다. 차승원 주연의 영화 '혈의 누'를 떠올리게 하는 '죽도의 한', 주온의 어린이 귀신 '토시오'를 닮은 '목각귀'도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귀신들의 변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포뿐 아니라 토속적인 유머와 인정이 넘치던 예전 전설의 고향이 그립다. 차라리 오리지널 지역민담을 바탕으로 공포가 아닌 소재도 간간이 섞었다면 공포물을 방영했을 때 효과가 더 커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情)'이 느껴지지않는 전설의 고향이다. 천천히, 느긋하게, 혹시나 이번주엔 공포물일까 하며 기다리는 재미를 느끼며 봤던 전설의 고향은 이제 기대할 수 없는걸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 자신이 공포에 무뎌진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냉방시설이 잘된 거실에서 불을 환히 켜고 푹신한 소파 위에서 보는 공포물들은 웬만해서는 무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매일같이 전세계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접하기도 한다. 친부가 딸을 강간하고 딸이 낳은 자신의 딸이자 손녀를 또 강간한다. 몇 m나 되는 고기가 잡혔다. 자고나니 온 얼굴에 문신이 덮여있다. 어린시절 친구가 자신도 오들오들 떨며 해주던 괴담들이 포털 중앙의 뉴스칸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들이 저마다 경쟁하듯 올리는 '팩트가 인정된' 괴담을 마우스를 딸깍이며 무심한 표정으로 '감상'한다. 여하튼 이런 삭막한 시대에 시청자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불철주야 촬영에 매달렸던(혹은 시퍼런 조명 앞에서 등에 와이어를 달고 나무에 매달렸던)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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