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르장머리''니나 가만히''혀 깨물고 죽지'…막말 정치가 날리는 '한글날의 품격'

'바른 말 사용' 강조되는 한글날
국감장에서 여야 '고함' 여전…"니(너)나 가만히 계세요""버르장머리""혀 깨물고 죽지"
尹 대통령 방미 발언 보름째 파장
한글 창제 반대 목소리 누른 세종…"이 XX들이 안 해주면' 태도 대신 끊임없이 설득 고민해 얻은 성과

훈민정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은 외국인이 박물관 내부에 설치된 훈민정음을 보고 있다./강진형 기자aymsdream@

"우리나라 말이 중국 말과 달라 한문 글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이가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나랏말쌈이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서문을 현대말로 옮기면 이와 같다. 세종대왕의 애민과 실용의 뜻을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 해례본에 쓴 '정인지 서문'을 보면 '세종이 만든 28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만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익힐 수 있다'고 했다.

이토록 알기 쉽게 창제된 한글이지만 제576돌을 맞은 올 한글날, 정치권에선 때 아닌 '듣기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바이든'으로 들었다 58.7% vs '날리면'으로 들었다 29.0%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 7차 재정공약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걸어 나오며 박진 외교부 장관 등 주변 사람들에게 한 사적 대화가 논란의 시발점이 됐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민주당을 비롯한 일각에선 윤 대통령이 '바이든'이라고 언급했다고 보고 '외교참사'를 지적했지만, 대통령실은 15시간 만에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여야 정치권 공방 속에서 좀체 결론이 나지 않자, 급기야 '바이든'으로 들리는지 '날리면'으로 들리는지에 대해 전국민 여론조사까지 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58.7%) 이상은 '바이든으로 들었다'고 답했다.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응답자는 29.0%였고, '잘 모르겠다'는 12.4%였다.(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9명 대상, 미디어토마토 9월26~28일 3일간 무선 ARS 방식 조사,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이 XX, 쪽팔려서'라는 비속어도 논란거리다. 바이든이라고 했을 경우 미국 의회를, 날리면 이라고 했을 경우엔 대한민국 국회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어떤 경우를 가정했든지 '이 XX'라는 발언 자체가 막말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의 '언어의 품격'은 지적받을 수 있다.

최근 이를 놓고 또다시 여론조사가 실시됐는데, 응답자 10명 중 6명인 63.2%는 '이 XX'라는 비속어가 들렸다고 답했다. '다른 말로 들었다'는 20.0%, '잘 모르겠다'는 16.8%로 나타났다.(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22명 대상, 미디어토마토 4~5일 이틀간 무선 ARS방식 조사,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이상 여론조사와 관련된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대통령 비속어 논란에 함몰돼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당초 내걸었던 '민생국회''민생국감'이 무색해지는 모양새다. 지난 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통신위원회를 대상으로 연 국감에선 해당 발언이 담긴 영상을 상영하며 윤 대통령의 '발음'을 비교하며 공방을 벌였다.

고함만 치다 '날리는' 언어의 품격…국회의원 "니나(너나) 가만히""버르장머리 없이""어디 감히""혀 깨물고 죽지"

국회의원들의 언행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매년 국감장을 '호통장'으로 부르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일단 고함부터 치고 보는 행태 때문에 그렇다.

지난 5일 국회 보건복지부 국감에서 야당은 윤 대통령의 어린이집 방문을 놓고 공세를 펼쳤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세종시 소재 국공립 어린이집을 찾았는데 이 자리에서 "아기들도 여기 오는구나, 2살 안 되는 애들도. (네, 6개월부터) 아, 6개월부터…그래도 걸어는 다니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대통령이 보고 내용을 미리 숙지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끼리 논쟁이 벌어졌다.

김원이 민주당 의원이 "저도 위원장한테 얘기하고 있어요! 좀 가만 계세요"라고 하자,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은 "니나 가만히 있으세요!"라고 대꾸했다.

'니(너)'로 시작된 신경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김 의원은 "대통령 닮아가시나. 그렇게 하니까 대통령이 '이XX, 쪽팔려' 하는 거다"라고 쏘아붙였고, 강 의원은 "대통령 스토커예요? (김 의원이 옷을 매만지자) 웃통 벗고 뭐하자는 거야?"라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지난 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서는 윤 정부를 '거짓말 정부'라고 표현한 이해식 민주당 의원의 발언을 놓고 여야 간 고성이 오갔다.

이 의원이 "윤 정부가 거짓말로 일관한다. 대통령실 이전비용이 496억원이면 충분하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하자, 국민의힘 간사인 이만희 의원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하며 '거짓말 정부'로 몰아붙이는 말씀은 위원장이 엄격한 주의를 시켜야 한다"고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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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민주당 간사인 김교흥 의원이 "언제부터 국회가 발언에 대한 통제를 받아야 하나"고 따졌다. 그러면서 급기야 "버르장머리가 없잖아!"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후 두 의원은 "누구한테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하나" "어디 감히 의원 발언에 대해서" "예의가 없잖아"라며 고성을 주고 받았다.

이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감에서는 여당 의원이 '이 사람이'라고 한 야당 의원에게 "함부로 말한다"고 지적하자 "아니, '이 XX'이라고는 안했다"고 비꽜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위원장의 일방적인 회의 진행에 야당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파행을 겪기도 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7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김도읍 법사위원장의 폭압적 회의 진행과 여당 의원의 의사방해 발언으로 인해 법무부 국정감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법사위를 폭력적이고 편파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위원장의 행태가 계속되는 한 정상적인 국정감사는 진행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특히 "'마이크 꺼라'는 명령으로 동료 의원의 발언 중 마이크를 끊어버리는 폭압적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국회의원의 발언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헌법적 권리이자 행위임에도 김 위원장은 상임위원장으로서 이를 보장하고 배려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혀 깨물고 죽지"

같은 날 과방위 감사에서 나온 말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한국원자력안전재단 감사에서 김제남 이사장이 윤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결이 안 맞다면서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김 이사장이 19대 정의당 국회의원 출신이었던 점을 언급하며 "이 둥지, 저 둥지로 옮기며 사는 뻐꾸기냐. 혀 깨물고 죽지 뭐하러 그런 짓을 합니까"라고 했다.

이 같은 발언이 논란이 되자, 권 의원은 "'나 같으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라고 한 거다. 김 이사장더러 혀 깨물고 죽으라는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내가 그런 경우라면 그렇게 행동 안 하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발언의 취지를 왜곡하지 말고, '나의 정치적 의지 표명'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이에 민주당 조승래 의원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동료 의원의 발언을 갖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마음이 편하진 않다. 그러나 굳이 국어 테스트를 하자고 하시니 (속기록을 보면) 권 의원은 ('혀 깨물고 죽지'의) 주어가 '나'라는 건데, 그 사람이 어떤 모욕감을 느끼는가 아닌가는 대화를 하는 당사자가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세종대왕동상./강진형 기자aymsdream@

'언어와 사고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언어생활을 할 때 그 속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문화적 특징들을 고려해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예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 고등학교 '문법''화법'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습관처럼 쓰는 말이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에 따라, '위로하는 말'인가 '비난하는 말'인가에 따라서 평소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대표성을 갖고 있지 않은 개개인에게도 말의 품격을 기대하게 마련인데,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막말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참담함까지 느낀다.

의견은 늘 충돌한다. 세종대왕 역시 집현전 학사들과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에 온 마음을 기울였지만, 사대사상에 물든 한자파 신하들의 반대에 끊임없는 상소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끝내 훈민정음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XX들이 승인 안해주면 어떻게 하나'라는 태도 대신 '어떻게 하면 반대파를 설득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고민하며 대화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오주연 기자 moon170@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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