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기본이 되는 도배지는 닥나무 섬유와 큰 꽃송이가 인상적인 황촉규(닥풀)의 진액으로 만든다. 요즘으로 치면 동물성 재료가 전혀 섞이지 않은 완벽한 비건(vegan) 제품이라 할 수 있다. 도배지를 벽에 붙일 때 쓰는 풀은 비건 제품과 논-비건 제품이 있는데 전통 연을 만들 때도 사용되는 쌀풀은 비건 제품에, 소가죽 부속물이나 생선의 부레를 끓여 만드는 아교는 논-비건 제품에 속한다. 풀을 바를 때 쓰는 붓은 안타깝게도 논-비건 제품이다. 붓의 몸체는 나무로 만들지만 솔 부분은 집돼지의 털을 모아 만든다.
풀과 붓까지 준비했다면 도배지를 바를 차례다. 과거에도 오늘날처럼 단단하면서도 두께감 있는 마감을 위해 최종 도배지를 바로 벽에 붙이지 않고 초배와 재배 과정을 거쳤다. 벽에 바로 붙이는 초배지의 경우 새로 만들어진 깨끗한 종이를 사용할 때도 있었지만 가장 안쪽에 들어가는 면이다 보니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낙폭지를 쓰기도 했다.
낙폭지는 과거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다. 물론 글자가 쓰인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고 답안지를 절구에 찧어 만든 일종의 재생지였던 셈이다. 한 장에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기와를 써놓고, 보이지 않는 면에는 재생지를 사용한 절약 정신도 이상하지만, 재활용을 해도 하필이면 과거 낙방 시험지라니 마음이 미묘해진다.
어쨌든 아나바다 정신으로 알뜰하게 초배지를 바른 후 깨끗한 종이를 한 번 덧바르고, 여러 장의 종이를 두껍게 배접한 장지를 마지막으로 붙인다. 당시에는 지금의 장판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바닥도 벽과 동일하게 도배했다. 대청처럼 열기가 닿지 않는 부분은 나무로 마감을 하고 온돌의 열기가 들어오는 구들은 장지를 발랐다. 두꺼운 종이로 도배를 끝마친 뒤에는 종이 자체의 강도를 올리고 습기를 막기 위해 장지 위로 들기름이나 콩즙을 발라 코팅하는 마지막 과정을 거쳤다.
잠시 도배를 막 마친 궁궐 전각을 상상해본다. 아주 말끔하고 희어서 보기에도 좋았겠지만 쌀로 만든 풀에 고소한 들기름, 콩즙까지 후각적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거기다 아궁이에 불까지 뜨끈하게 땐다면 덜 마른 쌀풀이 촉촉하게 익는 냄새와 들기름 냄새가 뒤섞여 무척 배가 고파지는 방이 되었을 것이다.
-김서울,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놀, 1만5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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