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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후회하기 좋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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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활동은 흔적 남겨
후회는 우리의 특권이자 열쇠
미래 역시 반성하는 자의 것
한 해를 보내며 '후회'하기를

[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후회하기 좋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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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 간다. 부풀었던 희망의 거품이 꺼지고, 공허감이 사람들 마음에 끈끈히 달라붙는 시기다. 연초의 설렘이 일어서서 뿌듯함을 이룩하지 못하고 무너져서 씁쓸함을 남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나 행복의 자디잔 파편들을 모아서 억지로 자기를 위로하고 기만하는 건 더 나은 삶을 향한 길이 아니다. 즐거운 척 먹자판 놀자판 송년회를 마친 후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쓸쓸한가. 후회할 때 결연히 후회하지 못하는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 미래학자 대니얼 핑크가 ‘후회의 재발견(한국경제신문)’에서 말하듯, 후회는 인간의 특권이다. 일을 시작할 때는 내다보며 예측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돌아보며 후회하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혁신해 온 열쇠다. 일찍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 중국의 현자들은 후회를 지도자의 핵심 자질로 삼았다.


상나라 탕왕은 세숫대야에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라"라고 새겨 두어 자신을 경계했다. 아침에 일어나 낯을 씻을 때마다 어제의 자신을 돌아보고 오늘의 자신을 다짐하는 자기 수양 행위를 통치의 본질로 삼은 것이다. 그가 성군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은 이유일 테다. 반대로 국민을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지도자는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후회의 힘을 지렛대 삼아 자기를 고쳐 쓸 수 없는 사람은 그 오만함 탓에 반드시 파멸하는 까닭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문명의 휘황한 성취에만 눈이 돌아간 사회는 빠르게 약해진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민음사)’에서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가상의 도시 레오니아를 통해 이를 경고한다. 레오니아 주민들은 새롭고 다양한 물건을 즐기는 데만 열정을 쏟아붓는다. 그들은 매일 아침 새 옷을 입고 최신형 냉장고에서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캔을 꺼내며 최신 모델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근 소식을 듣는 데 열중한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제의 물건은 아무 가치도 없고, 어제의 소식은 흘러간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삶의 흔적은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날마다 어제의 쓰레기들이 깨끗한 비닐봉지에 싸여 쓰레기차를 기다리고, 그 결과 도시 주변엔 쓰레기 벽들이 겹겹이 쌓여서 갈수록 높아진다. 한 번 버린 물건을 아무도 다시 생각하지 않기에, 새로운 물건을 즐길수록 쓰레기 요새가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한다. 최신 창문을 설치해 아무리 틈새를 틀어막아도 더 이상 악취를 막을 수 없을 때, 비로소 레오니아 주민들은 삶 전체가 쓰레기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고쳐 써 새것만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습성을 포기한다면, 저 무시무시한 쓰레기 더미가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쓰레기를 증오하고 눈앞에서 치워서 없애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레오니아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재의 쾌락에만 몰두하는 현대 문명의 알레고리이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에 따르면, 레오니아 문화에선 물건의 가치가 빠르게 생산해 순식간에 최대 효과를 짜낸 후 얼마나 빨리 낡은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레오니아가 보여주듯 이런 문화가 우리에게 남길 것은 결국 쓸모없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쓰레기뿐이다. 더욱이 과거의 삶이 남긴 걸 돌아보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회에선 결국 인간 자체도 쓰레기로 버려진다. 바우만은 말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자 현대판 멋진 신세계의 전진 기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


첨단의 그 삶에선 누구나 새롭게 등장하는 테크노 영웅을 열망하나, 실제 그 삶은 대부분 쫓겨나고 밀려나서 쌓이는 대규모 쓰레기 인간들만 남길 뿐이다. 쓰레기로 둘러싸인 도시가 파멸하듯, 쓰레기가 된 삶들이 늘어난 사회는 붕괴한다. 약자를 돌보고 패자를 챙기며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사회만이 번영을 이어갈 수 있다.


문명 역시 돌이켜 반성할 때만 지속된다. 내년 여름, 부산에서는 세계지질과학 총회가 열린다. 핵심 의제는 새로운 지질 시대인 인류세의 공인이다. 인류세란, 인간 활동의 결과가 지구의 물리적, 화학적 시스템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과학자들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크로퍼드 호수에 쌓인 퇴적층을 분석해서, 1950년대 이뤄진 수소폭탄 실험과 방사능 낙진에 따른 플루토늄 급증을 인류세의 출발로 삼았다. 이 밖에도 화석연료 발전소에서 나오는 구형탄소입자(SCP), 고농도의 납, 미세 플라스틱 등도 인류세의 주요 증거가 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지구에 위험한 흔적, 즉 쓰레기를 남긴다. 원자력의 힘을 이용해 무엇을 이룩했느냐만 살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쓰지 않게 됐을 때, 우리가 생산한 것이 사물로 되돌아갔을 때 어떤 결과를 빚느냐까지 성찰해야 우리 문명의 진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 이후의 철학(이비)’에서 시노하라 마사타케 교토대 교수가 말하듯, 인간 활동이 지구에 끼친 영향은 이미 자연의 모든 힘에 필적할 정도로 커져 지구 생태 자체를 바꿀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버려지고 방치돼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들이 우리 삶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고,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들의 힘 앞에서 우리는 놀랍게 취약하다.


우리가 버린 탄소 쓰레기가 지구 기온을 끌어올려 삶을 위기로 몰아간다. 우리가 남긴 방사능 폐기물이 대지와 바다를 오염시켜 생명을 위협한다. 우리가 쌓은 플라스틱이 먼지로 흩어져 우리 몸의 대사 질서를 뒤바꾼다. 지구는 하나뿐이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다. 인간 중심 사고에서 물러나서 지구 전체를 먼저 생각할 때 문명 붕괴를 막을 수 있다. 다가올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려면 지구라는 삶의 근원 조건을 떠올리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의 질서를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미래는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자기를 고쳐가는 자의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다. 후회하기 좋을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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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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