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심장부를 정조준하며 내달리던 검찰의 롯데그룹 비리 수사가 핵심 피의자의 자살로 암초를 맞았다. 그룹 ‘2인자’로 불리던 이인원 그룹 정책본부장(69·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검찰 수사 계획도 전면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26일 경찰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날 오전 7시 10분께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산책로에서 나무에 넥타이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이 정확한 신원확인 및 사인 파악을 위해 현장 감식과 지문 분석을 병행 중인 가운데, 인근서 발견된 차량 내부에서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은 이날 오전 9시 30분 이 부회장을 횡령·배임 등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계획이었다. 이 시각 현재 아직 검찰의 공식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자살 관련) 매우 안타깝다. 진상 파악 후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격호 총괄회장(94) 측근으로 분류되곤 하던 이 부회장은 지난해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62)과 신동빈 회장(61)의 ‘형제의 난’을 거치며 신 회장 측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7년 한국 롯데 핵심 계열사 롯데쇼핑 대표에 올랐고, 신 회장이 초대 본부장을 지낸 정책본부에서 부본부장을 맡다 2011년부터 본부장을 맡아왔다. 20년 넘게 그룹 심장부에서 근무하며 내부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인물 가운데 하나다.
검찰은 이 부회장을 상대로 그룹 내 계열사 간 자산·지분 거래,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한 배임 의혹을 중심으로 비자금 조성 등 경영비리 전반을 확인할 계획이었다. 신동빈 회장이 경영수업을 쌓은 롯데케미칼은 케이피케미칼 인수·합병 과정을 이용한 270억원대 조세 부정환급, 원료 수입 과정에서 해외 계열사 끼워넣기를 통한 200억원대 부당 수수료 지급, 세무조사 무마 로비 정황이 포착됐다. 롯데홈쇼핑은 사업권 부정 재승인 로비 의혹과 함께 9억원대 부외자금 조성 정황이 불거졌다.
국내 지주사 격인 호텔롯데 상장 준비 과정에서 계열사 자산 저평가 및 지분 이전에 따른 총수일가 수혜 몰아주기 의혹, 롯데피에스넷 등 유상증자를 통한 부실 계열사 부당 지원, 롯데건설의 2002년 이후 500억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 등도 수사 대상이다. 롯데건설은 하청업체를 통해 공사대금을 부풀려 지급하는 수법으로 조성한 비자금 일부가 신 총괄회장 비서실을 거쳐 불법 정치자금으로 흘러간 내역이 2002 대선 이듬해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지금의 경영 후계구도를 완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관여해 온 정책본부가 총수일가의 위법적인 자산 운용을 거들었는지도 규명 대상이었다. 검찰은 정책본부 산하 비서실이 계열사를 통해 매년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급여·배당금 명목 300억원대 자금을 조성·관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자금 성격을 추적해 왔다. 또 신 총괄회장이 장녀 신영자 롯데재단 이사장(74·구속기소), 사실혼 배우자 서미경(56)씨 및 딸 신유미(33) 모녀에게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6.2%를 차명 이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6000억원대 탈세 의혹 관련 정책본부 지원실이 이를 설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황각규 정책본부 운영실장(62·사장)과 더불어 그룹 내 2인자로 지목돼 온 이 부회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이르면 다음주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빈 회장 등 총수일가도 직접 불러 조사하려던 검찰 계획도 전면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핵심 중의 핵심 피의자로 지목돼 온 이 부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황 사장에 대해서도 신변보호를 위한 조치가 강구되리란 분석도 나온다.
검찰은 이 부회장, 황 사장, 앞서 지난 15일 참고인 조사를 받고 조만간 피의자 신분으로 재출석 예정이던 소진세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66·사장)까지 그룹 컨트롤타워 정책본부의 이른바 ‘가신3인방’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총수일가도 소환조사해 추석 연휴를 맞기 전 수사를 마무리할 것으로 전망됐었다.
다수 계열사에 명목상 등기 임원으로 이름만 올려둔 채 10여년간 수백억원대 급여를 부당하게 챙긴 의혹을 받는 신동주 전 부회장, 일본에 체류 중인 서씨 모녀 등이다. 검찰은 일가 장남이자 일본 롯데 경영에 오래도록 관여해 온 신 전 부회장을 상대로 그룹 지배구조 및 총수일가 지분 거래, 서씨 모녀를 상대로 편법 증여 및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 등을 규명할 방침이었으나 수사 일정을 전면 재검토할 처지에 놓였다.
검찰 수사 도중 핵심 피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해외 자원개발 비리 등에 연루돼 수사선상에 올랐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64)이 지난해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9년엔 노무현 전 대통령(63)이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수사대상에 올랐다가 투신 서거해 전 세계 헤드라인에 올랐다. 2010~2014년 검찰 수사 중 자살한 피의자 수는 60명에 달한다.
근래 들어 조사과정에서 언어·물리적 폭력은 대부분 자취를 감춘 것으로 전해지지만 형사처벌 대상에 오른 데 따른 심리적 압박감, 수사·재판 이후 사회복귀에 대한 염려 등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준영 기자 foxfur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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