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올렸다. AA는 21단계인 S&P의 신용등급 중 세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주요 20개국(G20) 중 우리나라보다 S&P 신용등급이 높은 나라는 네 나라밖에 없다. 독일·캐나다·호주(AAA), 미국(AA+)만 우리 앞자리에 있을 뿐이다. 유럽의 강호 영국과 프랑스는 우리와 같은 급이지만 이들의 전망은 '부정적'으로 '안정적'인 우리보다 못하다. 중국(AA-)과 일본(A+)은 우리보다 각각 한 단계, 두 단계 아래에 위치해 있다.
국가신용등급이란 한 나라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적용하는 신용도를 말한다. 개인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신용등급이 높으면 이자가 싸고, 낮으면 비싸듯이 국가도 신용등급에 따라 자금조달 금리가 달라진다. 우리 정부가 돈을 빌릴 때(보통 국채 발행) 중국과 일본보다 낮은 이자를 지급하면 된다는 얘기다. 국가신용등급은 공공기관이나 은행, 대기업의 신용등급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용도가 어느 수준의 나라 회사냐에 따라 조달 금리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국가신용등급 상향 소식에 국내 증시도 환호했다. S&P가 신용등급 상향을 발표한 8일 코스피는 올 들어 처음으로 종가 기준 2030을 넘었고, 9일에는 2040까지 돌파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외국인의 매수세도 재개됐다.
원화 값도 덩달아 올랐다. 3월 중순까지만 해도 12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10일 1100원선마저 무너졌다. 전문가들은 원화 가치가 당분간 더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나라의 신용도가 올라가고, 돈 값(통화가치)도 오르고, 증시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수치들만 보면 우리 경제는 탄탄대로처럼 보인다. '태평가'를 불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난 8일 신용등급 상향 뉴스가 전해지기 전까지 경제 관련 뉴스는 부정적인 게 주류였다. 한때 세계 1~3위를 휩쓸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조선사들은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중 한 곳은 수조원대의 분식회계 의혹에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까지 더해져 우리 정치와 경제의 민낯을 보여줬다. 침몰하고 있는 양대 국적 해운사의 회생도 요원해 보인다.
주요 대기업들의 실적은 회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고용 증가로 이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매출은 늘지 않는데 비용을 절감해 흑자를 내는 전형적 불황형 흑자를 기록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기존에 있던 인력은 구조조정하고, 신규 인력 채용은 적다 보니 고용의 질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니 하는 말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요즘에는 '헬조선'이라는 섬뜩한 신조어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나라의 신용도는 세계 최고수준까지 올라갔는데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980년부터 1997년까지는 국민총소득에서 가계와 기업 소득 비중이 각각 71%, 17% 수준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계 비중은 줄고, 기업 비중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런 양상을 더욱 고착화시켜 국민총소득 중 가계 몫은 62%로 낮아졌고, 기업 몫은 26%로 늘었다.
더구나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 경제를 둘러싼 환경도 좋지 않다. 주요 선진국들 가계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수출기업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자 선진국들의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도 보호무역으로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공약이었다.
대외 환경이 급격히 호전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내수를 키우고, 기업에 편중되고 있는 소득을 가계로 이전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국가신용등급 AA와 '헬조선'의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전필수 기자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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