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엔화 환율은 지난달 27일 1165.15원까지 올랐다. 사흘 전 발표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에 많은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으로 엔화를 택했다. 근래 일본은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 저투자라는 덫에 걸리고, 인구절벽(생산가능인구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현상)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번 급등으로 여전히 최고의 보험 수혜 국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세계 자본가들이 엔화를 사들인 것은 그들의 경제가 건실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엔화의 가치가 폭락한다고 해도 다른 통화권이 모두 망한 다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본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는 일본이 탄탄한 경제 기반을 유지하는 비결을 살핀 책이다. 이를 통해 개인과 기업이 다가올 저성장 시대에 생존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세계일보에서 도쿄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저자 정승욱은 프롤로그에 "버블경제의 허상과 잃어버린 20년을 근거로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한국 경제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그 어떤 국가보다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적었다.
그가 설명하는 잃어버린 20년은 노쇠가 아닌 성숙의 시간이다. 세계경제가 침체됐을 때도 노동시장구조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GDP 성장률 측면에서도 저력을 발휘한 점 등을 일본 후생노동성의 다양한 도표와 함께 근거로 제시한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제기된 견해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2012년 5월26일자에서 "일본은 서구만큼 깊은 경기침체로 빠져들지도 않았고 오히려 침체 기간에도 1인당 소득을 대체로 향상시켰다. 서구 경제학자들이 반면교사로 취급했던 일본 경제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할 정도다"라고 했다. 취리히대학 동아시아연구소 게오르그 블린트 연구원도 지난해 3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와의 대담에서 "지난 20년간 유럽의 선진국들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의 저성장을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는 일본이 위기를 돌파한 비결을 찾는데 있어 세 가지에 주목한다. 천황, 총리, 기업이다. 특히 천황에 대해 "우리 국민에게는 영 껄끄러운 존재지만 그를 모르고서는 일본과 그들의 경제를 알 수 없다. 존재감과 역할을 아는 것만으로도 일본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서술은 눈길을 끈다. 국내에서는 대개 태평양전쟁을 묵인했거나 형식적으로나마 승인한 전범, 혹은 군부와 정치권의 단순한 꼭두각시로 인식한다. 저자는 그가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주목한다. 히로히토 천황은 패전 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1976년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멈췄다. 저자는 "큰 어른과 같은 존재로 사회에 남아 눈에 보이지 않는 자발적 통제나 스스로 절제하는 미덕을 작동시켰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경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실제 사례는 4장 '상(商) : 위기마다 강해지는 기업의 저력'에 제법 등장한다. 최근 스위스 알콘을 제치고 안과용 나이프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마니를 비롯해 중국 유아용품 시장의 20%를 점유한 피죤, 전 세계 산업용 로봇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화낙ㆍ야스카와전기ㆍ후지코시 등의 성공 비법을 조명한다. 또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유서 깊은 중소기업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효율적인 시스템, 미래를 내다보는 연구 개발(R&D) 등을 소개하며 제2의 경제대국 지위를 회복하는 일이 머지않았다고 전망한다.
정승욱 지음/메디치미디어/1만4000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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