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이 다시 위대해질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
"한국국경에는 2만8500명의 훌륭한 미군이 있다.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사는데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는가?"
美 공화당 대선후보 트럼프의 출사표
주요 정책마다 본인의 방향·가치관 담아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를 우리나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견줘본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사업가 출신으로 실용주의를 표방하나 실제로는 장삿속(홍 지사는 '장사속'이라고 표현)으로 나라를 이끌었다고 봤다.
트럼프나 이 전 대통령이나 민간기업, 그중에서도 건설업종에 오래 몸담아 잔뼈가 굵다는 점이나 최상위층에 속할 정도의 적잖은 재산이 있다는 점, "내가 해봤다"면서 본인의 경험을 스스로 높이 사는 점 등은 일견 비슷하다.
방향의 옮고 그름을 떠나 기성 정치인에 대한 염증이 고조됐을 때 나타나 다수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점도 같다. 물론 이 전 대통령이 본선에서 여유롭게 상대 후보를 따돌린데 반해 트럼프는 여전히 경쟁후보를 좇는 입장이라는 점, 국회의원이나 시장과 같은 공직경험이 있는지처럼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최근 미국 대선구도를 보면서 2007년의 한국 정치지형을 떠올린 건 홍 지사뿐만이 아닐 테다.
도널드 트럼프가 직접 쓴 책이 최근 국내에 번역돼 출간됐다. 본선 가능성이 치솟은 만큼 살펴볼 만한 시점이다. 책의 제목 '불구가 된 미국'은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나올 당시 원제(Crippled America)를 직역한 것이다. 부제(어떻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인가. 이는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이기도 하다)나 표지에 쓰인 트럼프 본인의 사진도 원저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다소 화난듯한 트럼프의 표정이다. 이 책은 본인에 대한 소개를 비롯해 주요 정책에 대한 본인의 방향, 가치관 등이 담긴 출사표다. 정치인들이 다수 대중에게 호감을 얻고 반감을 줄이기 위해 통상 온화한 표정을 내세우는 점을 감안하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머리말 첫 문장에서 이 같은 사진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절름거리는 미국을 이야기한다. 안타깝게도 좋은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은 표정, 기쁨보다 분노와 불만을 담은 표정을 찍은 사진을 쓰기로 했다."
맨 뒷쪽에는 본인 스스로에 대해 소개한 부분이 딸려있다. 자산은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92억4030만달러(이후 1년반 정도 지나 책을 출간했을 당시에는 100억달러가 넘었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사회생활을 해왔는지를 대략 시간순으로 설명한다. 본인 소개의 절반 가량은 건설ㆍ부동산개발을 하며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사고 팔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서울 여의도와 용산 곳곳에 보이는 트럼프라는 이름이 붙은 고층빌딩도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의료보험·총기소유 등 구체적 계획 제시
주한미군문제 등 한미관계 예상 가능
골칫덩이·질 나쁜 사람 등 원색적 표현
책 표지 사진부터 인상 쓴 표정 '눈길'
트럼프는 책에서 미국 내 주요 이슈를 꼽아 현재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본인이라면 어떤 식으로 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시각을 비롯해 이민ㆍ외교ㆍ교육ㆍ의료보험정책에 대한 견해, 총기소유의 타당성이나 기반시설을 다시 짓고 건설업에 주력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실행계획도 담겼다. 이미 경선이나 각종 강연을 통해 소개된 내용이 많다. 그가 무조건적으로 이민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흔히 비춰지지만, 실상은 "이민을 사랑한다"(어머니나 조부모가 이민자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면서 막고자 하는 것은 불법이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첫 장에 배치된 '다시 이기기 위해'는 대통령 트럼프가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우리나라, 미국이 다시 위대해질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고 천명하고 있다. 선거전략이든 진심이든(본인은 진심이라고 강변한다)미디어에 비친 트럼프를 통해 철 지난 패권주의 망령이 투영되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비(非)미국인으로선 오싹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사드배치 논란이 국내 정치권은 물론 경제산업분야까지 영향을 끼치는 건 이 사안이 미국은 물론 북ㆍ중ㆍ러ㆍ일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역학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리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당장 어느 지역에 배치되는지, 결정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두고 시끄럽지만 밑바탕에는 미국의 대외정책, 그중에서도 한국과 동아시아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트럼프는 주한미군문제 등 국방분야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에 땅을 붙이고 있는 장삼이사도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문제라는 얘기다. 대한(對韓) 관계를 어떻게 펼쳐낼지 구체적인 플랜이 적혀있지는 않지만 책을 통해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트럼프는 "한국 국경에는 2만8500명의 우리 훌륭한 미군이 있다.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산다. 오직 그들이 한국을 지켜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대가로 한국에게서 무엇을 받는가?"고 반문한다. 이는 의도적인 외면이다. 책 뒷쪽에서 군대를 확대하고 방위산업을 키우는 게 미국에, 미국의 노동자에게 득이 된다는 점을 적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이처럼 일방적인 측면만 얘기하는 건 자기기만에 가깝다.
미국의 주요 대선후보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표방하는 정책의 내용이 우선 중요하겠지만 책에서 잘 드러나는 건 그가 주변이나 사태를 대하는 태도, 혹은 말하는 방식이다. "감옥과 정신병원에 있는 골칫덩이", "질 나쁜 사람" 등 원색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굳이 이런 표현을 숨기지 않고 적극 사용하는 건 이에 대해 반감을 갖는 대중은 물론 호응하는 이들이 적잖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정치적 공정성에 매달릴 시간이 없다"고 자랑스레 얘기하고 있다.
당초 트럼프는 이 책의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은 게 최근 알려져 다시 한번 유명세를 탔다. 인터넷에는 트럼프를 일컬어 그가 당선된다면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다는 우스갯소리가 돈다. 다시 홍준표 지사의 넋두리를 빌려보자면, 너무 걱정만 하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허나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 어땠는지를 되짚어본다면 마냥 걱정 없이 관망할 수 있을까.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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