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는 오래된 상처이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채 복구하지 못한 흉한 자욱이다.
흉터엔 아픔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 아픔을 환기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그것에 흉(凶)한 이름을 붙인 것은
몸의 일부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힐책일지도 모른다.제 몸을 채 건사하지 못한,
그래서 생긴 상처를 채 회복하지도 못한,
그 몸의 일부에 부여하는 매서운 독설인지 모른다.
흉터는 얄궂게도 늘 조금씩 가렵다.
아마도 죽어버린 아픔의 꼭지가 그렇게 가려움으로
풀려져있나 보다. 그 가려운 자리를 긁어가다 보면
상처의 끝자락이 툭 터진다.아픔은 그저 흉터 아래에
숨어있었을 뿐,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점점이 작은 흉터들로 내 온몸은
거대한 괴로움덩이같은 게
아니겠는가?
어느 날엔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아물게 해주지만
흉터처럼 남아 어느 순간에 다시 떠올라 아픔을
환기시켜준다.이것을 정신의 흉터라 할 수 있을까?
흉터는 우선 어떤 자욱이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무의식 혹은 의식에 내장된 기억들 중에서
늘 내면 한쪽에 돌출되어 있는 흉한 기억.
되돌아보고 싶지 않지만 가끔씩 내성의 눈이
살펴보고야 마는 그 괴로운 기억의 일부.
그 돌출된 기억들을 더듬노라면 그 안쪽에
억눌린 가려움으로 가득 엉켜있는
어떤 아픔들. 아문 듯이 보였던 상처의
내부는 여전히 아픔으로 출렁인다.
마음에도 흉터가 있다.
흉터의 특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픔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평생을
지고가야할 몸의 일부가 되었다.
흉터도 몸이다.나를 특징짓고 나의 지난날을 증거하는
몸. 몸 곳곳이 숨은 흉터들을 만져보는 일은
그래서 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진지한 애무이다.
발등을 긁고 지나간 함석자국은 지금
아주 작지만 또렷한 내 고통의 문신이 되어
내 오른쪽 발을 수놓고 있다.그 흉터가 사라진
발은 내것이 아니다.
저 흉터는 30년을 함께 내 몸 위에서
공서(共棲)해온 동지다.
등주위에 커다란 흉터를 숨기고 있던
한 여인과의 옛일을 생각하는 것은
그 상처가 기표하는 고통들이 자아내는
생명체에 대한 깊은 공감대와 결부되면서
그리움을 더욱 진하게 한다.자동차 사고때
생긴 상처를 애무하는 연인들을 그린
어느 변태적인 성애 영화에서처럼
흉터는 그 징그럽게 일그러진 몸에서
살아있음의 달콤함을 깊고 따뜻하게 공감하는
신물이 될 수도 있으리라.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은밀한 흉터들을 서로에게 내보이고 그 아픔들에
접지하여 연대를 키우는 마음일 지도 모른다.
옷 한겹을 벗겨보면 연약한 가죽에 싸여
늘 위태롭고 조마조마한 삶.그 표피에 다가오는
느닷없는 상처와 멍들의 시련은 어쩌면 살이를
더욱 긴장하게 하고 값지게 하는
도전이 아닐까.흉터들은 살아있음을 방해하는
어떤 위협을 뛰어넘은 또렷한 훈장이다.
그것이 정신의 은유일 때도 마찬가지다.
아픔없고 상처없고 멍없고 흉터없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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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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