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세' 혹은 '남우세'란 말은 이 사회의 오래된 기분이 서린 말이다. 남에게 웃음과 조롱을 받게 되는 처지를 왜 그렇게 두려워 했던가. 자기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을 들이대어 가치를 책정했던 문화를 드러내는 이 말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다. 집안에 싸울 거리가 있어도 남들이 들을까봐 속으로 꾹꾹 눌러 참는 것이었다. 원, 집안 남세스럽게 무슨 큰 소리를 낸단 말이고. 어머니의 강력한 논리였다. 남세스럽지 않으려는 노력은 뭐든지 격식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면 일단 얕잡아 보는 체면 중시의 체질을 내 속에도 키워왔다. 사내 자식이 부엌을 들락거리면 못써. 허허, 조카에게 웬 공대여?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척족에게 말을 어려워하면 그렇게 꾸짖었다. 그게 남세스러운 일인가. 그건 아니었지만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의 윗길에 늘 저 남세스러움과 체면치레의 강철잣대가 놓여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얄궂어보이는, 이 문화에 대해 통찰한 사람은 미국의 인류학자 베네딕트였다. 그는 이것을 '남부끄러움의 문화(shame culture)'라고 불렀다. 이 셰임컬쳐는 요즘에 와서 '쪽팔린다'라는 비속어로 다시 부활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점검하고 그 가치를 결정하는 태도는 젊은 세대에게 여전히 유전되어 있는 증거이리라. 베네딕트는 이에 대응하는 문화를 지닌 지역으로 서유럽을 들었다. 이를 '죄의식의 문화'라고 불렀는데, 여기는 내면적인 자기 검열과 종교적 내성(內省)이 가치를 결정한다.
서구인들의 죄의식이 개인주의적 문화의 산물이라면 우리의 남세스러움은 집단주의의 태아이다. 공동체 속에서 발달되어 있는 '선량한 위선'들은 진정한 가치보다 껍데기 체면에 집착하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남'이라는 객관화 과정을 통해 공인된 가치를 내면화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지금 우린, 남세스러움과 죄책감이라는 두 개의 문화코드를 오가며 앓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봤을 때 그럴 듯 해야 하는 아파트 지역과 평수는 남세스러움의 변질된 코드이다. 유난히 외제 브랜드가 잘 침투하는 것도, 고물 핸드폰이 눈 깜짝할 새 폐기처분되는 것도, 보여지는 문화 속에서 남세스럽지 않으려는 과잉의 노력들의 결과이다.
거기다 우린 서투르지만 죄책감도 배워가고 있다. 종교적 내성은 잘 모르겠으나, 이성이라는 잣대는 껍질로 이해되는 기존의 가치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살다보면 가끔 우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걸 설명할 말들을 찾는다. 남에게는 어찌어찌 설명이 되겠으나,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나와 그 설명을 듣는 내가 전혀 다른 표정이다. 하나는 남세스러워 하고 하나는 비웃는다. 그 비웃음 속에 깊은 아픔이 묻어난다. 내겐 남세스러움보다 자기를 찌르는 자기의 시선이 더 두렵다. 서구화되어서 그런 걸까?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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