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일 만에 뛰었습니다 홍 감독님, 보셨습니까
[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2005년 6월 16일(한국시간) 네덜란드 에먼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F조 조별리그 2차전이다. 0-1로 패색이 짙은 후반 44분에 약관의 공격수 박주영이 원맨쇼를 시작한다. 아크 정면에서 얻은 프리킥. 오른발로 감아 찬 공이 나이지리아의 골문 왼 구석에 꽂혔다. 3분여의 추가 시간이 끝나가던 후반 47분, 박주영의 발끝에서 결승골이 시작된다. 문전에서 상대 수비 네 명 사이로 날린 슈팅이 골키퍼를 맞고 흐르자 백지훈이 달려들어 왼발로 차 넣었다. 짜릿한 역전승. 그는 왼쪽 팔꿈치 탈골로 압박붕대를 감고 출전한 이 경기 후반 3분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등 악전고투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었고 한국 축구도 이겼다.
▶다시 인저리 타임에 서다
박주영(29)은 브라질에 가기 위해 팀을 바꿨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아스널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뛰지 않는 스트라이커는 녹슨다. 박주영은 1일 챔피언십(2부 리그) 소속 왓포드 FC로 이적했다. 뛰어야 하므로. 데뷔전은 이틀 뒤인 3일에 열렸다. 상대는 브라이턴 호브 앨비언이었고, 홈경기였다. 다시 인저리 타임(추가 시간). 후반 45분에 교체 선수로 들어가 5분 남짓 뛰었다. 무려 96일 만의 실전 경기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뛴 경기는 지난해 10월 30일 첼시와의 캐피털원컵 16강전이었다. 왓포드에서 뛴 5분은 박주영에게 의미 있는 첫 걸음이다.
▶역사를 쓸 때 그가 있었다
박주영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가 첫 동메달을 딸 때 결승골을 넣었다. 한국이 처음으로 홈그라운드 밖에서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박주영의 골이 필요했다. 그는 2010년 6월 23일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눈부신 프리킥으로 나이지리아의 그물을 흔들었다. 0-1로 뒤진 한국이 이 골로 기사회생했다. 굵직한 대회에서 한국 축구가 골을 갈망할 때, 박주영은 주저없이 응답했다. 승부처에 그가 있었다. 2004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선수권에선 6골로 득점왕과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한국의 우승. 특히 10월 9일 중국과의 결승전에서는 수비수 네 명을 제치고 결승골을 넣었다. 성인 대표 팀 데뷔전도 특별했다. 2005년 6월 3일 우즈베키스탄 원정경기로 열린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0-1로 뒤진 후반 45분 동점골을 넣었다. 박주영의 대표 팀 발탁 여부를 놓고 논쟁하면서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평가절하한 조 본프레레(68·네덜란드) 감독의 입이 닫혔다.
▶뛰지 않았다, 쉬지도 않았다
박주영은 아스널에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출전하지 못한다고 해서 축구를 쉬지는 않았다. 아스널의 홈페이지에는 늘 밝은 표정으로 훈련하는 박주영의 사진이 심심찮게 실렸다. 96일의 실전 공백은, 오히려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박주영의 잇단 결장은 몇 년은 쉰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주영은 지난 시즌 아스널을 떠나 스페인의 셀타 비고로 임대됐고, 거기서 컵 대회 포함 26경기를 뛰는 동안 4골을 넣었다. 매 시즌 경기에 나갔고 골을 넣은 것이다! 그랬기에 축구 대표 팀의 홍명보 감독(45)는 박주영을 발탁할 기회를 엿본 것이다. 홍 감독은 박주영의 이적 소식에 “박주영이 '2013년까지 아스널에서 도전하고 실패하면 2014년 이적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서 다행”이라고 반색했다. 십중팔구 박주영을 뽑을 것이다.
▶표류하는 대표 팀 최전선
대표 팀 공격수 자리는 주인을 찾지 못했다. 경쟁이 치열해서가 아니라 합격점을 받은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세 차례 평가전(코스타리카 1-0, 멕시코 0-4, 미국 0-2)에서 한국은 겨우 한 골을 넣었다. 두 명이 퇴장당한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공격력은 개탄스러웠다. 김신욱이 한 골 넣었지만 아홉 명을 상대로는 골이 없었다. 스타 출신의 지도자들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해주는 선수는 따로 있다”는 공통된 믿음이 있다. 홍명보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브라질행 최종 엔트리 발표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왓포드에서 박주영이 그라운드를 밟은 인저리 타임은 브라질을 향한 경쟁에서도 추가시간이다. 박주영은 그의 축구 인생을 점철한 드라마가 그러했듯 극적인 결승골을 꿈꾸며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시작은 늦었다. 그러나 아직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은 울리지 않았다. 박주영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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