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 지난 10월 평택시 팽성읍 한 아파트에서 61세 여성 A씨가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A씨는 성폭행 피해자였다. 두 달 전 평택 모 병원에서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고 입원 중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아주머니가 해 달래서 한 거 아니냐"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경찰은 현장검증을 한다며 피해자의 눈 앞에서 강간 상황을 재연했다. 피해자는 현장검증 도중 실신하고 말았다. A씨가 남긴 A55매 분량의 유언장에는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인 고통으로 약과 주사가 효과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노인성폭력 피해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쉽게 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아동성폭력에 가려져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는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증가세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지난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김영주 선진통일당 의원이 발표한 경찰 자료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인 성폭력 피해 건수는 2009년 244건, 2010년 276건, 2011년 324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 성폭력 피해 역시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7일 오후 한국여성의전화가 인권위원회에서 연 토론회에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노인 성폭력문제는 관련 법 제정이나 운용과정에서 제대로 거론된 적 조차 없다"고 말했다. 특히 노인들은 급속도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보 소외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 이사는 "얼마 전에는 피해자가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고소과정부터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법원에서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는데도 내용을 모르는 사례를 접하기도 했다"며 "아동 성폭력 피해자 이상으로 노인 피해자들에게도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사건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다르다. 젊은 세대보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 만큼 정신적 상처가 크게 남는다. 신고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박종숙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여성노인들은 성폭력을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인지해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신고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사례는 더욱 직접적으로 신고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조보현 변호사는 "노인성폭력은 기본권 침해 정도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는 데 한계가 있고, 연령상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성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인들은 신체기능의 저하 때문에 자기방어가 어려워 성폭력 범죄대상으로 쉽게 지목된다. 아동 등 '약자'를 노리는 성폭력 범죄의 속성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독거노인의 인지력은 절반 이상이 인지기능 저하 혹은 치매로 의심되는 수준이다. 빈곤율도 47.2%에 달하는 데다 보호체계도 허술해 성폭력 피해가 증가하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 8월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성폭행 후 살해된 78세 피해자 역시 20년 넘게 혼자 살아왔고 폐지를 모아 생활비를 마련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측은 "먼저 여성노인 성폭력에 대한 전반적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노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성적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가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거나 말하더라도 의심받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노인 성폭력 피해자에 걸맞는 지원대책 마련도 촉구됐다. 성폭력 치유는 물론 법원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진술조력인, 법률조력인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여성노인성폭력 실태조사, 여성독거노인 파악 등 기본적 통계 작업부터 들어가야 한다"며 "노인 특성에 맞는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노인을 일상에서 만나는 자원봉사자부터 상담소, 경찰, 의료진까지 교육 대상자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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