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7일 태안에서 발생한 허베이스피리트호 원유 유출 사고는 국가적인 대응 수준을 넘어선 최악의 환경재난이었다. 13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사고현장을 찾아 수습에 동참하는 등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태안의 생태계나 지역 주민들은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환경오염 영향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고유의 정밀분석이다. 그리고 이때 활용되는 것이 기름의 유지문(油指紋)이다.
유지문이란 사람이 각자 고유한 지문을 갖고 있는 것처럼 각각의 기름이 갖고 있는 고유의 화학적 조성을 일컫는 말이다. 긴 지질학적 시간을 거쳐 석유가 만들어질 때 재료가 된 유기물의 성분비, 온도, 압력 등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화학적 조성을 갖게 되는데 이를 유지문이라 한다.
유지문의 활용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의도적이든 아니든 유류가 유출되었는데 원인자가 밝혀지지 않은 경우 원인자를 식별해 내는 데 활용된다. 둘째, 유류 유출의 원인자를 알고 있으나 유출 해역 주변 환경이나 생물 등이 유출된 기름에 의해 오염되었는지 여부를 입증하는 데 활용된다. 두 번째 활용 분야는 평상시에도 자동차와 공장 배출가스, 폐수, 생활하수 등을 통해 기름 성분이 만성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유지문 분석은 단계적 접근법을 이용한다. 간단한 분석에서 점차 정밀한 분석으로 진행함으로써 효율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1단계에서는 가스크로마토그래피(GC/FID)를 이용하여 포화탄화수소를 중심으로 분석을 실시하고, 2단계에서는 주로 질량분석기(GC/MS)로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 및 유류분자화석(oil biomarker)을 분석한다.
유지문 분석을 통해 획득된 다양한 탄화수소 성분 중에서 유류마다 고유한 값을 갖고 있는 특정 물질 간의 성분비를 판별지수로 활용하여 사고유와 혐의유 간의 일치와 불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3단계가 된다.
최근의 유지문 분석 기술 개발 현황은 각종 분석기기의 발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차원 가스크로마토그래피 분석 기술'과 '개별화합물 동위원소 분석기술'이다. '다차원가스크로마토그래피 분석'은 기존의 모세관컬럼으로 분리가 되지 않던 화합물을 한 번 더 분리해 냄으로써 3차원적 분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류 중의 미분리혼합물(UCM)의 분리 분석을 포함해 수천종의 탄화수소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개별화합물 동위원소 분석기술'은 한 종류의 탄화수소 화합물에 포함되어 있는 탄소의 동위원소 함량을 정량으로 분석하는 기술이다. 석유는 생성 과정에서 탄화수소의 성분비가 달라질 뿐 아니라 각 탄화수소 화합물의 탄소 동위원소 비(13C/12C)도 차이를 보인다.
유지문을 분석해 유류 유출의 원인자를 식별하는 것은 형사상의 처벌은 물론 민사상의 피해보상을 위한 법적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유류는 물론 다른 유해물질의 불법 유출 및 오염의 원인자를 식별하기 위해 유사한 화학적 분석 기법들이 활용되고 있는데, 이를 법의학에 대비하여 환경법과학(Environmental Forensics)이라 부른다.
환경법과학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환경오염 문제로 인한 지역, 국가, 이해당사자 간의 환경분쟁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 주는 분야로 유지문 기법은 대표적인 환경법과학 분야다. 국내에서도 최근에는 각종 환경분쟁 해결을 위해 유지문 기법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환경법과학적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임운혁 한국해양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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