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 2008년 7월 또 하나의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됐다. 경북 상주시에 사는 한 40대 남성이 집을 수리 하다가 고서 더미에서 우연히 찾아낸 것이었다.
이 상주본 해례본은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안동본 해례본과 동일한 목판 인쇄본이었다. 훈민정음의 음가와 문자 운용법을 적은 예의(例義) 3장과 서문의 마지막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지만 상태가 좋아 국보급으로 평가됐던 상주본 해례본이 발견된 지 3년 만에 도난품으로 밝혀졌다.
9일 대법원 등에 따르면 사건은 배모(48)씨가 조모(66)씨의 골동품 가게를 찾으면서부터 시작됐다. 평소 고서에 관심이 많아 수집을 즐겼던 배씨는 조씨의 가게에 갔다가 눈에 띄는 고서를 하나 보게 됐다. 틀림없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조씨가 그 고서가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걸 모른다고 확신한 배씨는 2008년 7월26일 대담하게 범행에 나섰다. 조씨의 가게에서 고서 2박스를 사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다른 고서들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었다. 배씨는 그렇게 30만원을 주고 상주본 해례본을 빼돌렸다.
배씨의 대담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범행 이튿날 배씨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고서 하나를 문화재로 지정받고 싶다'는 글을 올렸고, 상주시청 문화체육팀 공무원에게 상주본 해례본 가운데 일부를 보여주며 문화재 지정절차를 문의하기도 했다. 며칠 뒤 배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집수리 도중에 이 고서를 발견했다'고 말해 상주본 해례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방송을 본 조씨가 경찰에 진정서를 내면서 이 해례본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진정과 고소, 가처분 신청, 소송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배씨는 상주본 해례본 실물을 꼭꼭 숨겨가며 공개를 거부했다. '상주본 해례본은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고서들 가운데 하나다'라고 주장하는 배씨에게 조씨는 '상주본 해례본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것으로, 가게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배씨가 훔쳐간 것'이라고 맞섰다.
상주본 해례본의 진짜 소유주를 밝히려 수명의 증인이 여러 차례 법정을 찾은 것을 비롯해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됐다. 3년 가까이 계속된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이 이날 확정 판결을 내렸다. 배씨가 조씨의 가게에서 고서 2박스를 사면서 상주본 해례본을 몰래 끼워 넣는 방법으로 훔친 사실이 인정되므로, 배씨는 조씨에게 이 해례본을 돌려줘야한다는 것이었다.
배씨는 현재 상주본 해례본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문화재청 등은 이 해례본이 훼손되거나 국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해 배씨가 조씨에게 최대한 빨리 인도해줄 것을 요구할 방침이다. 조씨는 상주본 해례본을 돌려받는대로 이를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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