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원기자
산유국들의 기습적인 감산 조치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향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경로에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 초반으로 둔화하는 모습을 보인 만큼 아직은 오는 4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국제유가 상승으로 진정세를 보이던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다시 악화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한은의 매파(통화긴축 선호)적 스탠스가 다시 강화될 수 있다.
한은은 4일 오전 김웅 부총재보 주재로 '물가 상황 점검회의'를 개최하고 최근 물가 상황과 향후 흐름을 점검했다. 김 부총재보는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기저효과가 크게 작용하면서 2월 전망 당시 예상한 대로 상당폭 낮아졌다"면서도 "향후 물가 경로상에는 국제유가 추이, 국내외 경기흐름, 공공요금 인상 폭 및 시기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한 것은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압력을 낮추는 요인이다. 이날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4.2% 상승해 최근 1년 사이 가장 낮은 오름폭을 기록했다. 앞서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7일 방송기자초청 토론회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월 이후로는 4.5% 이하로 떨어지고, 연말에는 3% 초반까지 떨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는데 아직은 이와 부합하는 수치다.
물가가 한은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한은은 금융안정 측면을 감안해 기준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추가 금리인상이 이어질 경우 저축은행이나 증권사 등 약한 고리부터 유동성 부족이 나타나며 시장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은이 현재 연 3.5% 수준에서 금리인상 행보를 멈출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이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70~80달러 수준에서 안정세를 보인다는 가정 하에서의 전망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기타 산유국으로 구성된 협의체인 OPEC+가 지난 2일(현지시간) 하루 116만 배럴 규모의 추가 감산을 발표하면서 유가가 오름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기존에 한은이 예상한 물가 경로와 통화정책 방향도 수정될 수 있다.
이미 서부텍사스원유(WTI)와 브렌트유는 장중 6% 이상 급등하며 배럴당 80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수준을 상회한다면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자극하는 동시에 소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무엇보다 에너지 가격 안정으로 그나마 둔화되던 물가 압력이 재차 확대될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최근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 초반대로 떨어진 데에는 국제유가 하락이 큰 영향을 미쳤다. 물가상승률이 연말까지 3%대로 떨어진다는 전망이 수정되면 한은이 다시 금리인상에 나설 수도 있다.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이 2월과 3월 각각 4.8%의 높은 수준이고, 국제유가 상승으로 Fed의 기준금리 인상 전망이 다시 확대되고 있는 것도 한은의 금리 인상에 힘을 보태는 요인이다.
다만 일각에선 이번 산유국들의 감산이 국제유가와 통화정책 경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임환열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 원유 수요와 성장률은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세계 성장률이 올해 1.7%로 둔화될 것을 고려하면 원유 수요는 1.5% 증가에 그칠 전망"이라며 "2분기 유가는 80~90달러 사이에서 등락해 평균 85달러를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데 주요 판단 지표 중 하나인 환율도 여전히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원·달러 환율은 전날 산유국 감산 소식에 장중 1320원을 돌파하며 급등했으나 이날 다시 1310원 아래로 떨어졌다. 김승혁 NH선물 연구원은 "OPEC+의 감산 조치는 호주달러 등 원자재 통화의 강세를 이끌어내 달러 측면에선 하락 재료"라며 "이에 따라 원달러 환율도 하락 흐름을 보일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