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지난 2월 이후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9월에 중대한 분수령을 맞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9월부터 유럽의 난방용 천연가스 수요가 급증하면서 러시아의 자원무기화 전략이 극대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법에 따른 무기·자금지원도 종료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들과 잇따라 밀착외교를 벌이며 에너지가격 담합에 나서고 있다. 또한 9월 열리는 러시아 내 지방선거와 연계해 우크라이나 점령지역의 러시아 합병에 대한 주민투표를 강행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주민투표 강행 계획에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미국과 서방의 지원이 줄어들면 전선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국 미국의 지원이 종료되면 국토 분단이 수반될 러시아와의 휴전협상을 받아들여야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에 대항하기 위해 회원국들에 천연가스 소비를 15%씩 감축하라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벌써부터 반발이 커지고 있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이 이미 해당 계획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헝가리는 러시아에 오히려 가스공급을 늘려달라고 요청하면서 EU의 대러제재 공조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21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스페인과 그리스 정부는 EU의 가스소비 15% 감축제안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들 국가들은 다른 EU 회원국들보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낮은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과 같은 비율의 감축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테레사 리베라 스페인 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이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훨씬 적게 사용하고 있는데 모든 국가에 일괄적으로 15%씩 소비를 감축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스페인 가정에 가스나 전기공급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는 EU 회원국마다 천차만별이다. EU의 통계청인 유로스탯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스페인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는 10%, 그리스는 38.4%로 EU 평균치인 43% 대비 낮은 수준이다. 이에 비해 독일(66%), 폴란드(54%), 헝가리(95%), 불가리아(75.2%), 체코(100%) 등 중·동부 유럽국가들의 의존도는 50%를 넘는다. 이에따라 EU가 일괄적으로 제시한 15% 의무감축안을 두고 논란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헝가리 정부는 아예 러시아에 직접적으로 가스공급을 늘려달라고 요청해 EU의 대러제재를 무색케 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시야트로 페테르 헝가리 외무장관은 21일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기존보다 약 7억㎥ 이상의 가스를 추가로 공급해줄 것을 러시아측에 요청했다.
러시아는 이란, 사우디 등 중동국가들을 대상으로 잇따라 밀착외교를 벌이며 에너지가격 담합을 공고화하는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자원무기화 전략 극대화를 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크렘린궁은 이날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와 이날 전화통화를 가졌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해당 통화에서 OPEC+(석유수출국기구 및 산유국 협의체) 내에서의 가격안정 유지를 위한 추가적 조율을 강조했다고 크렘린궁은 전했다.
특히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를 순방한지 5일만에 이뤄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폴리티코는 "이번 통화는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이 양국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푸틴 대통령과 역시 유가문제에 있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어하는 사우디 왕세자 양자에게 모두 도움이 된 통화"라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보다 앞서 19일에는 이란을 직접 방문해 러시아, 이란, 터키 3국간 정상회담을 갖고 에너지 및 식량문제와 시리아 내전 등 중동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이란과는 400억달러(약 52조3000억원) 규모의 천연가스 개발·투자계약도 체결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도 9월에 일단락된다. 추가적인 지원을 위해서는 지원법을 추가로 발의해야하지만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급락 중인 상황에서 쉽지 않을 전망이다.
CNN에 따르면 앞서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5월21일 한국 방문 중에 서명한 우크라이나 지원법에 따른 400억달러 규모 무기·재정지원은 9월에 종료된다. 이후 추가 지원을 위해서는 다시 예산을 편성해 지원법안을 마련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미 정치권 내에서는 미국 내 심각한 인플레이션 등 경제문제가 심화된 상태에서 추가 지원법안은 상정조차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 초반까지 급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퀴니피악대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31%에 그쳐 역대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또한 전체 71%가 바이든 대통령의 2024년 재선 출마를 원치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번 중간선거에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참패할 경우,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공화당 내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면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법안은 처리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메릴랜드대학이 최근 공화당원들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감내할 수 있냐는 질문에 찬성한 답변은 39%에 그쳤다.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9월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주민투표를 대대적으로 개최해 해당 지역들을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키려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현재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지역들에 대해 지난 2014년 크림반도 강제병합 때와 유사한 주민투표 실시를 계획 중"이라며 "러시아의 9월 지방선거와 연계해 주민투표를 강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앞서 지난 5월 주요 점령지역인 헤르손과 자포리자 지역 등에 괴뢰정부를 설립했으며, 주민투표 실시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페트로 안드리우셴코 마리우폴 시장 보좌관은 지난달 28일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가 도네츠크 지역 합병을 위해 9월11일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고 밝힌 바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러한 러시아 계획에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미국과 서방의 지원이 주춤해지면 전선 유지가 어려운 만큼 결국 러시아의 요구안을 감내해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러 평화협상 대표인 데이비드 아라카미아 의원은 지난달 19일 미국의소리(VOA)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향후 평화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반격을 진행할 것이나, 8월 말까지는 평화협상에 복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휴전협상은 지난 3월29일 터키의 중재로 열린 5차협상이 결렬된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