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자두나무는 열네 살/심은지

자두가 익어 갈 무렵아기 주먹만 한 풋자두 두 개를 골라껍질에그 애 이름을 새겨 넣었다뜨거운 여름날이 계속되고푸른 잎 뒤에 감춰진 몸에서는달달한 향기가 피어났다뒤란 자두나무 아래흔들리는 푸른 밤을 지켜보다가깜박 조는 사이자두나무는 몸을 기울여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태풍 불던 어느 날자두나무가 심하게 흔들렸다그 애 이름 두 글자가자두나무에서뚝, 떨어져 내렸다
■자두는 열네 살. 막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열네 살. 아직은 볼 빨간 열네 살. 왜 그런지는 자두도 몰라, 모르는데 시도 때도 없이 골만 나는 열네 살. 세수하다 괜히 아빠 면도 크림을 발라 보는 열네 살. 별거 아니네 싶은 열네 살. 세상이 조금씩 만만해 보이는 열네 살. 뭐든 할 수도 있고 뭐든 안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열네 살.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놀기로 결심한 열네 살. 그래도 심심은 하니까 학원엘 가는 열네 살. 학원 가는 길에 우연히 스친 옆 학교 그 애. 그냥 무진장 이쁘기만 한 그 애. 안 그래도 빨간 볼이 그 애 생각만 하면 왕자두만큼이나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자두. 왜 그런지는 이번엔 자두도 진짜 몰라. 자꾸 비죽비죽 웃음만 나는 자두는 열네 살.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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