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농장 일 하느라 작품 안내는 작가… 팬들 '과수원에 불질러?'

소설가 이영도, 김유정 통해 들여다본, 작가의 가난과 창작열

언제부터인가 작가에게 가난은 창작의 '당연한' 질료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나머지, 우리는 그들의 곤궁한 삶과 빈한한 처지까지 작품처럼 소비하고, 어느 작가의 쓸쓸한 죽음까지 죄책감 없이 가십처럼 다루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가난을 작가의 미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진짜 가난에 허덕였던 어느 젊은 문인들의 비극적 소식을 실컷 양껏 재주껏 물어 날라 멋대로 애도하고, 동정하며 돌아서선 회사생활 열심히 해야지 했던 이들의 뇌리엔 그저 ‘작가 = 가난’이 당연한 공식처럼 붙어있고, 그들의 비극적 삶은 한 편의 시, 한 편의 소설처럼 적당한 유행으로 소비하고 이내 잊어버리기 일쑤다. 궁당익견(窮當益堅), 곤궁해도 더욱 굳세져야 할 것은 작가가 아니라 북방의 장군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가난해야 (비교적)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많은 신인 작가들은 최저시급을 밑도는 여건 속 통장잔고를 확인하며 창작의 의지를 불태우고, 작품 발표가 더딘 중견작가를 향해 독자들은 ‘빨리 가난해져라’ 염원을 보태는 풍경에는 가난이 창작의 동력 되길 바라는 각자의 ‘웃픈’ 소망이 담겨있다.

국내 판타지 소설작가 1세대로 꼽히는 소설가 이영도는 [피를 마시는 새] 이후 단편 발표만 간간히 하고 있는 상태. 이에 골수 팬들은 '그의 과수원에 불을 지르겠다'는 애교섞인 협박을 농담처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작가님 과수원에 불 질러야겠어요국내 장르 소설가 중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와 인기를 얻은 이영도 작가는 과거 빠르고 흡인력 있는 필력과 연재속도로 많은 팬들을 잠 못 들게(자정이 넘어 원고를 올렸으므로)한 일명 ‘네크로멘서(주술사, 독자를 좀비로 만든다는 의미로 붙은 별칭)’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유명세와는 반대로 작품활동은 점점 뜸해져 최근에는 장편보다는 단편 위주의 발표가 이어지자 팬들은 그의 일상생활에 주목하게 됐고, 공교롭게도 작가가 집필 외 시간엔 부모님의 감 농장에서 일손을 거들고 있다는 소식에 감 농사가 흉년이 들 때마다 단편이 나온다는 농담 섞인 추측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젠 장편이든 단편이든 가리지 않고 그의 후속작 발표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팬들은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과수원에 불을 지릅시다’, ‘감을 비롯한 과일값이 폭락했으면’, ‘차기작이 과수원을 마시는 새여도 좋으니 제발 발표만…’ 하는 반응을 내놨을 정도. 한 집요한 팬은 해당 감 농장의 보험가입 사실을 확인한 뒤 ‘불내면 보험금(?) 때문에 더 안 쓰게 될 것’이란 웃지 못할 우려를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중국, 일본 등 해외 판권 수익이 수억에 달한 작가에게 과수원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며, 쏟아지는 기대에 따른 필연적 과작(寡作) 현상이 아니겠냐는 이성적 지적을 수용하며 오늘도 그의 많은 팬들은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소설가 김유정은 명망 높은 양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나,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몰락한데 이어 작가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일제강점기 현실에 떠밀려 가난, 그리고 폐결핵에 시달리다 1937년 2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사진 = 왼쪽 김유정, 오른쪽 [동백꽃] 초판 표지

돈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 고아먹겠다지난해 대한민국을 휩쓴 AI와 나날이 심화된 경쟁은 치킨집을 ‘자영업자의 무덤’으로 몰아갔지만,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닭 소비량은 15.4kg으로 집계되며 변함없는 ‘치킨사랑’을 입증한 바 있다. 80년 전 세상을 뜬 한 소설가는 가난에 내몰려 건강을 해치고, 병상에 누워있는 중에 닭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친구에게 돈 좀 구해 달라 읍소의 편지를 띄웠다.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 이야기다.“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1930년 쌀 한 가마에 13원, 1932년 의사 월급이 75원이었으니 그가 말한 100원은 적잖이 큰돈이었다. 신문에 기고해봐야 1꼭지당 1원에서 2원 하는 고료를 받는 현실을 잘 알고 있던 김유정은 친구에게 탐정 소설 번역을 알아봐 달라 부탁한 뒤, 번역료를 받으면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다짐하고 소망했으나 끝내 닭 한 마리 먹어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조선 후기 화가 전기가 그린 계산포무도는 가난한 선비가 가난을 비롯한 세사에 초탈해 스스로 거하는 공간을 스승 추사 김정희가 강조한 '문자향', '서권기'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글 쓰는 선비는 날 때부터 부호가 아닌 이상 가난하기가 지금의 작가와 매한가지였다. 사진 = 전기,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1849년, 종이에 수묵, 42 x 26 cm, 국립중앙박물관

남는 밥과 김치가 있으면 문을 두들겨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요절한 시나리오 작가 이야기는 닭 30마리 고아먹겠다던 김유정의 편지와 묘하게 겹쳐 보이는 데서 80년 전과 불과 6년 전, 그리고 오늘까지 여전하고 한결같으며 집요한 작가의 ‘가난’을 읽어볼 수 있다. 맹자는 선비는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현달해도 도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故士窮不失義達不離道) 고 지적했고, 조선후기 위항시인 정이조는 당대의 가난한 동료 시인의 처지를 두고 “선비가 글을 잘 지으면 곧 궁해지는 것은 어찌하여 그러한가. 아니면 곤궁해진 뒤에야 글이 잘 지어지는 것인가(豈士能文則困窮耶 抑窮而後工也)”라고 한탄했다. 작가를 벼랑 끝으로 모는 칼임과 동시에 그 벼랑 끝에서 더없이 훌륭한 문장을 끌어내는 낚싯바늘로써 가난은 여전히 작가에게 있어 애증의 대상이자 영원한 창작의 무한 동력이 아닐까.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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