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방한 D-10일]'내포의 2백년 눈물', 교황과 청년들이 닦아내나 ?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오는 14∼18일 '제 6회 아시아청년대회'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내포지역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내포에서는 교황과 청년들의 세차례 만남 중 두차례가 이뤄진다. 특히 아시아청년대회 주제가 “젊은이여 일어나라,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추고 있다”로 정해지면서 2백여년 동안 이어져온 내포지역의 종교적·역사적 트라우마가 치유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교황과 아시아 청년들의 첫 만남은 15일 낮 세종시 전의면 소재 대전 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에서 마련된다. 이곳에서 교황은 17개국의 아시아 청년 대표들과 비공개 오찬을 나눈다. 만 77세인 교황과 같은 식탁에 앉을 한국 대표는 세계청년대회 참가 경험이 있는 20대로 알려졌다. 가수 보아도 아시아청년대회 홍보대사 자격으로 참석한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에서 교황과 아시아 청년들과의 두번째 만남이 이뤄진다.

◇솔뫼는 어떤 곳인가 ? = 두 번째 만남은 15일 오후 솔뫼 성지에서 열린다. 솔뫼는 한국 가톨릭의 발상지로 한국 최초의 성직자인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에서 교황은 총 6000명의 아시아청년대회 및 한국청년대회 참가자 전원과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을 갖는다.솔뫼는 충남 당진 소재로 내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이다. 송산이라고도 불린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했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다. 내포를 비롯, 서해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진 서학 및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내포지역에는 실학사상의 한 분파인 서학을 중심으로 학문이 펼쳐졌다. 내포의 선비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1784년, 김대건 신부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해 솔뫼가 ‘내포 신앙의 발상지’로 변모했다. 김 신부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여러 사람이 투옥되고 고문 받다가 순교했다. 솔뫼 성지 조성사업은 1906년,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가 성역화를 위해 토지매입을 시작됐다. 이후 1945년 백 빌리버 신부가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전개됐다. 1982년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해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이곳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3명의 청년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인생 대선배로서 답변한다. 형식은 즉석 답변과 연설로 이뤄진다. 질문할 청년들은 이미 선발된 상태다. 국적은 캄보디아, 홍콩, 한국 등 3인이다. 이들은 각자의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성소(하느님께 받은 소명), 종교 박해 상황에 있는 중국에 대한 선교, 인생의 가치관에 대해 물을 예정이다. 대전교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박진홍 신부는 “질문 내용에 사회 이슈도 고려했지만 결국 청년들의 진솔한 인생 고민을 담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정리됐다”고 말했다. 연설에 이어 교황은 청년들과 함께 기도한 뒤,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만남을 마무리한다.

8월 17일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해미성지 폐막미사 때 사용될 십자가들. 나무 십자가에 참가자 청년들이 ‘성령의 은혜와 열매’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주최측은 참가국 수와 같은 23개의 십자가를 조립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용할 제대를 만들 계획이다. 해미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등이 처형된 장소다. 교황과 아시아청년들은 해미성지에서 폐막 미사를 연다.

◇ 해미성지는 ? = 마지막 만남은 17일 오후 충남 서산 소재 해미읍성에서 열릴 아시아청년대회 및 한국청년대회 폐막 미사다.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된 곳으로,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를 내가던 읍성 서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순교한 옥터, 순교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던 ‘호야나무’ 등이 남아 있다. 해미는 천주교 신자가 가장 큰 대규모 학살이 이뤄진 곳이다. 내포 지방에 일찌기 서학부터 시작해 천주교가 널리 전파된 까닭이다. 해미 고을은 "해뫼"라고도 일컬는다.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이다.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돼 1400∼1500여 명의 군사들이 주둔했다.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며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담당했다. 이곳에서는 조선 후기인 179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약 100년간, 천주교 신자 수천여명이 처형됐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공식적인 대박해 외에도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금의 해미 읍성에는 두 채의 큰 감옥이 있어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항상 가득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에서 군졸들은 매일같이 신자들을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끌어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생매장형 등으로 죽였다. 심지어는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을 고안, 죽이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했던 돌다리가 보존돼 있다. 해미 순교탑과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큰 구덩이에 파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농부의 연장 끝에 뼈들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뼈 중에는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된 것도 있었다. 산 사람을 묻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들어서면서 창설됐다.폐막 미사의 중심 공간인 제단(祭壇)은 읍성 서문 옆에 조성된다. 바로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죽어서 나간다는 읍성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여겼던 자리다. 그 문 옆에 교황이 자리하고, 청년들은 교황과 마주봄과 동시에 천국 문을 바라보며 기도하게 된다. 교황이 미사를 드릴 제대(祭臺)는 아시아청년대회에 참가한 23개국 청년들이 장식한 십자가를 조립해서 만든다. 아시아 가톨릭 청년들의 하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다.이날 미사는 다양한 언어의 향연으로 이뤄진다. 성경 독서는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신자들의 기도(보편지향기도)는 일본어, 영어, 힌디어, 한국어 등으로 낭독된다. 그 밖의 기도문은 교황은 라틴어로, 신자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바친다. 그래도 교황과 청년들의 기도 내용은 똑같다. 미사 때 읽는 기도문과 성경의 내용은 전 세계 가톨릭이 동일하기 때문이다.아시아청년대회의 폐회사가 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은 평소에 하던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어로 이뤄진다. 교황은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다. 이와 관련, 박 신부는 "아시아인의 다수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어 교황은 최대한 많은 청년에게 통역 없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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