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갑 '대형서점'의 횡포, 값의 몰락

<3>알맹이 없는 정부의 출판진흥정책, 대안은 없나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도서정가제 붕괴로 출판유통구조가 무너지고 있지만 지난 9월 발표한 정부의 '출판문화산업 진흥5개년 계획'에서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계획이 전무한 수준이다. 그동안 출판계에서 강력하게 요구해온 도서정가제와 유통시장 개선에 관한 대책으로 '급변하는 도서유통과정 및 가격관련 실태를 조사ㆍ분석해 관련 법령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내놨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유통질서를 바로잡는 데 불법출판물유통신고센터 지원비로 8000만원을 투입하는 게 전부"라며 "도서정가제를 정립하기 위한 예산은 찾아보기 어렵고 , 공정위나 규제위의 눈치를 보면서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며 정부 대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 출판정책의 허술함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유통구조개혁을 둘러싼 출판계 내부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3>알맹이 없는 정부의 출판정책, 대안은 없나 <4>출판생태계 복원의 열쇠는 '독자'가 쥐고 있다 ◆도서유통구조 개혁 시급하다= "이벤트는 뭐 하실 겁니까?", "실용서 코드가 아니네요." "이렇게 하시면 노출할 수가 없습니다." 중소 출판사 마케팅 담당자가 온ㆍ오프라인 대형서점의 도서 머천다이저(MD)를 만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현재 도서유통구조에 의하면 신간은 대형서점의 MD를 거치지 않으면 시장에 나올 수가 없다. 중소형 서점 및 도매상의 몰락과 온ㆍ오프라인 대형서점들의 독과점 현상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을 팔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한 중소출판사 사장은 "대형서점의 MD들은 사실상 출판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자와도 같다"며 "도서정가제가 무용지물인 데에는 이 같은 출판유통의 구조적 시스템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간을 내고 처음 하는 일이 서점MD를 만나서 책 판매를 상담하는 일인데 여기서 '책이 죽느냐 사느냐'가 대부분 결정된다"며 "독자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책을 진열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그는 "실용서와 잘 팔릴 만한 책이 아니면 책을 보지도 않는 서점 MD들과 접촉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낀다"며 "좋은 책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통로가 좁아질수록 출판사들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된다"고 토로했다.  이어 "출판사가 공개적으로 유통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도 같아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도서유통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형 서점뿐만 아니라 도매상에 대한 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센, 송인서적, 북플러스와 같은 대형도매상의 잘못된 관행 역시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대형 도매상에게 들어간 책의 대금은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 이상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도매상에 책이 들어가면 수금이 안되기 때문에 출판사는 거래를 꺼리게 되고, 현금으로 익월에 바로 결제해주는 온ㆍ오프라인의 대형 서점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형도매상들의 재정건전성과 거래관계의 투명화를 유도하고, 정부가 제도적ㆍ 정책적으로 지원해 도매상과 지역 동네서점의 유통구조가 정상화되고, 출판사들이 안심하고 책을 맡기고 수금할 수 있는 구조가 확립되면 현재의 악순환은 상당 부분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가제 이후, 출판사와 서점의 미래는?= 이렇게 열악한 여건 가운데서도 출판과 도서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출판가와 서점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완전 도서정가제의 시행과 유통구조의 정상화라는 토대가 마련돼야 그 꿈을 계속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며 '구조요청'을 보내고 있다. 서울대학교 앞에서 1988년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한결 같이 그 자리를 지켜온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 이 서점은 주요 고객인 대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책 읽기 모임'과 강연회, 저자와의 대화, 독서기행, 서평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교류하고, 지역사회에 흩어져 있는 개인들을 서점이라는 공간에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앞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점 운영은 힘겹기만 하다. 이 서점의 김동운 대표는 "지금과 같이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판매되는 구조가 계속된다면 서점의 미래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사회과학서점의 맥을 이어간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힘든 조건 하에서도 근근이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라며 "실제로 서점을 운영하는 데 20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후원회의 도움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날이 오면'을 비롯해 동네의 작은 서점들이 살아남으려면 도서정가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한다"며 "그런 조건 하에서만 서점이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공간이자 사랑방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서점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들과 공감대를 만들어가면서 동료적 관계로도 발전할 수 있다"며 "이 같은 노력이 힘든 와중에도 서점에 활기를 가져다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가제가 확립되고 서점운영이 가능한 조건이 만들어진다면 전문서점이 아닌 일반 서점들도 충분히 지역주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서점 심병섭 대표

국내 대학가의 첫 사회과학전문서점이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아지트였던 건국대 후문 앞 인(人)서점 대표 심병섭(70·사진)씨 역시 "현재는 암수술을 받은 환자가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버티고 있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지만 동네서점을 일상적으로 찾는 독자수가 100만명이 된다면 서점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심 대표는 "지금도 한달에 100만원 정도의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버티고 있다"며 "이같은 조건에서 서점이 새로 생겨나는 것은 바랄 수도 없고, 있는 서점들도 문을 닫는 게 당연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인서점 역시 서점을 아끼는 후원자들의 모금으로 벌써 두 번의 폐업 위기를 넘겼다.  심 대표는 "인문학 서적을 다루는 공간으로 지켜나가기 위해 강연회나 토론회 등을 개최하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며 "암담한 현실이지만 앞으로도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지식의 소통을 담당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점뿐만 아니라 출판사 역시 전문성을 키우고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재건 그린비출판사 대표는 "웹 서비스를 통해 독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 전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독자층이 구체적으로 파악됐다"며 "독자와의 관계 구축을 통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독자의 요구를 반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 대표는 "물론 출판사의 이 같은 노력은 도서정가제 시행과 유통구조 개선 등 생존의 기본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며 "정부의 제도적인 지원과 출판계 내부의 노력이 합쳐지면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출판사와 서점들이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기획ㆍ생산ㆍ유통하는 현재 구조는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상미 기자 ysm1250@<ⓒ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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