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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바다와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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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바다와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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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제국' 베네치아를 가장 잘 그린 화가. 지오반니 안토니오 카날(Giovanni Antonio Canal)이 1697년 오늘 태어났다. '카날레토'로 더 잘 알려진 풍경화의 대가다. 그는 이 기적과도 같은 도시의 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 빛과 대기가 빚어내는 미묘한 효과를 포착하는 데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베네치아 토박이('운하'를 뜻하는 Canal이 그의 성이다!) 카날레토가 젊은 날에 그려낸 베네치아의 풍경들은 한결같이 걸작이다. 카날레토는 초기작인 '산마르코 광장'이나 '석공들의 뜰' '동쪽을 바라보는 대운하 입구 풍경'에서 이미 빛과 그림자를 다룰 줄 아는 예술가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카날레토의 예술은 베네치아의 운하와 바다를 그릴 때 가장 빛을 냈다. '대운하 입구 풍경'은 상징과 같은 작품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앞에서 노를 젓는 곤돌라 사공들은 옛 옷을 입은 21세기의 사나이들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대운하에서 열린 경주대회'에서는 건강한 함성이 메아리친다. 한 시대를 지배한 해상공화국의 패기가 공간마다 충만했다.


6세기 훈족에 쫓긴 로마인들이 리알토 섬을 중심으로 석호에 나무기둥을 박아 베네치아를 세웠다고 한다. 내다 팔 물건이라고는 봉골레(조개)뿐이었다는 베네치아가 어떻게 지중해의 주인이 됐을까. 이 공화국의 위대한 역사에 주춧돌을 놓은 두 인물이 있다. 피에트로 오르세올로와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공화국의 국가원수인 도제(Doge)들이다.


오르세올로는 1000년 아드리아해의 해적을 쓸어버리고 달마티아를 획득해 교역항로를 확보한다. 베네치아 역사에 선명한 '오르세올로의 출항'이다. 이 승리 이후 수세기 동안 아드리아해에는 베네치아에 도전할 경쟁자가 없었다. 단돌로는 1204년 십자군 원정대를 움직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 막대한 부와 이권을 베네치아로 옮겨다 놓았다.


베네치아공화국의 해상 패권을 상징하는 의식이 '바다와의 결혼식(Sposalizio del Mare)'이다. 바다와의 결혼식은 오르세올로의 달마티아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 도제는 매년 기독교의 기념일인 '주님 승천 대축일'에 배에 올라 행렬을 이끌고 리도 앞바다로 출항한다. 그리고 축성된 반지를 바다에 던지면서 외친다. "진실하고 영원한 주님의 증표로써 우리는 그대 바다와 결혼한다!"


베네치아는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도시다. 괴테는 1786년 9월28일 저녁, 배를 타고 경이로운 섬의 도시에 들어가면서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독과 더불어 인간역사의 숭고함을 체감한다.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누빈 그는 "이는 인간의 힘을 결집시켜 만들어낸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작품이고, 지배자가 아닌 민중의 훌륭한 기념물이다"라고 경탄한다.


카날레토는 바다와의 결혼식 장면을 두 장 남겼다. 1732년과 1734년에 완성한 두 작품 모두 화려하고도 엄숙한 의식을 짐작하게 해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1797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해 5월16일 나폴레옹 군이 두칼레 궁전(도제의 관저)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바다와의 결혼식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매년 베네치아 시장이 작은 바지선에 올라 의식을 집전한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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