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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러시아 발레의 양대산맥 볼쇼이와 마린스키
최종수정 2018.11.07 14:38기사입력 2018.11.07 14:38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러시아 발레의 양대산맥 볼쇼이와 마린스키 한정호 객원기자
발레는 국내 대중의 통설처럼 러시아에서 발원해 볼쇼이와 마린스키에서 처음 꽃핀 장르가 아니다. 발레는 13세기 이탈리아 왕정이 타국에 위신을 내세우려는 목적으로 궁정 사교춤을 장려하면서 발원했다. 16~17세기 프랑스 왕정에서 앙리 2세, 루이 14세의 관심으로 '발레(Ballet)'라는 용어와 세계 제1의 발레단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신 '왕정 무용음악 아카데미'가 설립됐다.


근대 양식으로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규격화된 발레가 시작된 곳은 러시아다. 18세기 낙후한 러시아 문화 발전 방편으로 서구화를 채택한 표트르 대제는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 스타일을 차용한 사교 무용을 궁내에 권장했고, 유명 프랑스 낭만 발레 안무가들을 러시아에 초빙했다. 19세기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의 안무가 샤를 르 픽을 러시아 궁에 들이고 발레 교육과 이론서가 정리되면서 발레의 기원, 이탈리아 양식에 대한 재조명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재개됐다. 또 다른 서방 지도자 샤를 디드로, 쥘 페로, 아르튀르 생레옹이 그동안 행해진 기술을 다듬고, 훌륭한 댄서를 양성하는 기교와 이론을 정비했다. 과감하게 서방을 받아들인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발레 장르는 러시아 고유의 문화 상품으로 제대로 포장됐다.


지금은 러시아 발레의 양대 기둥으로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꼽지만 러시아 발레의 맏형은 마린스키다. 서구 지도자들이 쌓은 기반 위에 1869년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 마스터로 임명된 마리우스 페티파(1818~1910)가 오늘날 '클래식 발레'로 통칭되는 러시아 발레의 전반적인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페티파가 남긴 업적의 핵심은 클래식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와의 공동 제작이었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라이몬다'가 그렇게 나왔다.


19세기 중반부터 마린스키에서 발레 명작이 급증했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설적인 기량의 댄서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였다. 안나 파블로바, 바츨라프 니진스키 같은 세기적인 춤꾼들이 마린스키뿐 아니라 파리에서 연출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조력으로 러시아 발레의 영광을 세상에 알렸다. 고난도 테크닉보다 정서의 표현에 집중한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의 이름도 마린스키와 무용수들의 이름과 함께 돌았다.

[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러시아 발레의 양대산맥 볼쇼이와 마린스키 볼쇼이 발레 '백조의 호수' 올가 스미르노바_세묜 추딘 (C) Bolshoi Ballet

러시아 발레의 판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뒤바뀌었다. 혁명 이후 핵심적인 인재들이 이탈하면서 과거에서 눈을 돌려 동시대의 삶을 그린 발레를 제작했다. 당시 키로프(마린스키의 공산 시절 명칭)의 명성을 지킨 이들은 무용수였다. 갈리나 울라노바, 마리나 세묘노바처럼 훗날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한 댄서들이 도시를 지켰다.


역설적으로 볼쇼이가 발레 역사에서 제 목소리를 낸 것도 사회주의 혁명부터다. 황실 붕괴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소련)으로 국가 체계가 변화하면서 모든 문화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이동했지만 발레계 수뇌들은 모스크바행에 머뭇거렸다. 정부가 지원하지만 마린스키 극장 시절 이룩한 발레 수준을 모스크바에서 재현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회의적 반응이 주를 이뤘다.


볼쇼이가 키로프와 어깨를 견주게 된 시점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혼란기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발레에서 캐릭터 솔로이스트와 안무작으로 주목받은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1964년 37세의 나이로 200년 역사의 볼쇼이 극장과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모스크바에 오면서 소련 발레의 주도권을 모스크바가 행사하게 됐다.


그리고로비치는 카리스마와 재능을 함께 갖춘 안무가라는 평가가 부임 초기부터 소련 선전 신문과 통신인 프라우다와 타스를 통해 따라 붙었다. 알렉산드르 고르스키, 카시얀 골레이조프스키 같은 볼쇼이 발레 선대 안무가들이 남긴 과거 작품에 1960~197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부여하는 심리적 접근에 대해 소련 공산당도 만족했다. 정교한 테크닉을 중시하고 발레리나의 우아함과 아우라, 발레리노의 위풍당당함을 강조하는 현대적 스타일은 볼쇼이의 서방 공연을 통해 유럽에서 인기를 얻었다. 여성의 존재에 가려 보조 무용수에 그쳤던 주역 발레리노의 위상이 돋보일 방법들을 백색 클래식 발레에서도 끄집어냈고, '스파르타쿠스'처럼 강인함이 대명사인 남성 위주의 발레를 창시해 "발레는 볼쇼이"라는 공식을 세계 시민들에게 심어줬다.


언제나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할 것 같았던 볼쇼이의 권세도 소련 붕괴에 이어 1998년 러시아 정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과거 서방 투어를 통해 소개된 전설적인 발레리나들인 나탈리야 베스메르트노바, 니나 아나니아시빌리,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나탈리야 오시포바로 이어지던 볼쇼이 스타 계보가 2010년대 초반 들어 희미해졌다. 특히 2010년대 들어 볼쇼이가 겪은 스캔들은 미증유의 참사와 다름없었다. 2011년 3월 겐나디 야닌 극장 부단장은 자신의 동성애 관련 사진이 유포되면서 사퇴했다. 2000년대 초반, 과체중으로 발레단에서 나온 발레리나 아나스타샤 볼로치코바는 "정치인과 무용수 사이의 성매매를 사무국이 주선한다"면서 볼쇼이 수뇌진을 맹비난했다.


무용단이 흔들리자 스타들도 대거 볼쇼이를 떠났다. 2000년대 후반부터 발레단의 간판 커플이었던 오시포바와 이반 바실리예프는 "볼쇼이에선 예술적 창조성이 제한받는다"면서 2011년 인지도가 한참 처지는 미하일로프스키 발레단으로 옮겼다. 파동은 2013년 1월 세르게이 필린 발레 감독을 겨냥한 황산 테러로 절정을 맞았다. 2018년 볼쇼이의 내한 공연진은 새 인물로 2020년대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볼쇼이의 선언과 다름없다.


키로프 역시 소련 붕괴 후 다시 마린스키로 개명했지만 기나긴 슬럼프를 겪었다. 마린스키 발레를 구원한 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다. 게르기예프는 소련 붕괴와 거듭된 러시아 경제의 부침에도 결국 마린스키 극장을 2010년대 가장 번성한 오페라 하우스로 만들었다. 게르기예프를 향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최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를 짓고 이곳을 마린스키 분관(4극장)으로 지정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본관과 함께 이원 체제로 운용 중이다.


2018년 세계인에게 볼쇼이와 마린스키는 무엇인가. 발레는 고비용 구조가 불가피하고, 그래서 고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장르다. 부르주아와 시민층의 지갑만으로 발레가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술 역사가 증명한다. 특히 러시아 발레는 집권층이 발레의 가치를 알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을 때 번영했다. 이따금 있는 볼쇼이ㆍ마린스키의 내한 공연이 우리와의 수준 차를 확인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 정책 입안자와 위정자들부터 제대로 발레와 저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발레가 고전으로 자리 잡기 위해, 관객은 무용인들에게 시대의 맥락과 끊임없이 대화할 것을 권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볼쇼이의 부패를 경계하고 게르기예프의 행태가 파쇼에 준한 건 아닌지, 발레 예술의 미래를 고민하는 러시아 시민 사회의 움직임은 여전히 부족하다. 러시아 발레가 그저 제3세계에 나가 또 다른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원형을 과시하며 금전을 확보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장르는 정체하고 인재는 러시아를 떠날 것이다.


객원기자ㆍ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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