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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한국 대표 소설가들이 엄선한 박완서의 명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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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작가 박완서의 타계 15주기를 기리는 단편소설선 '쥬디 할머니-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박완서 단편문학의 성취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선집으로, 한국 대표 소설가 31명이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전7권)에 수록된 97편 가운데 추천한 작품을 바탕으로 10편을 엄선해 엮었다. '도둑맞은 가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등 널리 읽혀온 대표작과 함께 '쥬디 할머니' '애 보기가 쉽다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등 재조명할 만한 작품도 수록됐다. 박완서 문학의 깊이와 현재성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단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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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한국 대표 소설가들이 엄선한 박완서의 명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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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생활은 조금씩 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조금씩 조심스럽게 일정한 생활 밖의 어떤 지점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상하도록 흥분해서 슈퍼마켓 사층을 갈팡질팡하다가 갑자기 몽유병에 깨어난 것처럼 자신이 왜 거기 있는지 몰라 우두망찰을 할 적이 자주 있었다. _「쥬디 할머니」, 21쪽

행운이 자기편이란 믿음 때문인지 맹범씨는 자기에게 돌아온 행운을 받아들일 때 과연 받을 만한가 아닌가 망설이거나 개인적인 행운과 그 시대와의 관계에 어렴풋이라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가 지난 지금도 그 시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이 없었다. 타인이 질문을 던지거나 의혹을 갖는 것도 싫었다. 그의 시각으론 마냥 같은 시대가 계속되는 걸로 보였고 따라서 그 시대를 반성하거나 정리해야 할 까닭은 추호도 없었다. 근데 딴 사람도 아닌, 그의 행운의 덕을 가장 많이 누린 식구들이 행운에서도 가장 꽃다운 데에다 그런 방자한 평가를 내리면서 즐거워하다니 울분이 목줄기를 뿌듯하게 했다. 그는 울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_「애 보기가 쉽다고?」, 42쪽

그녀가 그때 홀로 맹수였다면 우린 얼마든지 간에 붙었다 콩팥에 붙었다 할 수 있는 토끼나 다람쥐 나부랭이였다. _「공항에서 만난 사람」, 93쪽

성적인 의미의 여자라도 좋고, 나의 할머니가 툭하면 몸서리를 치면서 전생으로부터 특별히 많은 죄를 짊어지고 태어났다고 믿는 족속으로서의 여자라도 좋고, 심심한 남자들이 각별히 심심한 시간에 그 족속들에게도 영혼이라는 게 있나 없나를 무성의하게 회의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자라도 좋고, 아기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얼굴과 호칭을 익히는 엄마로서의 여자라도 좋다. 아무튼 그 노파들은 여자였다고, 죽는 날까지 여자임을 못 면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_「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130~131쪽

그는 전화 목소리가 그가 찾고 있는 가족이거나, 최소한 가족의 소식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려니 짐작하면서도 예상한 감동이나 기쁨은 일지 않았다. _「재이산(再離散)」, 141쪽

"아들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자가 둘도 많다로 변한 것도 몰라? 꼭 그대로 해야 된다는 법적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즈음 젊은 부부라면 의당 인구문제를 모른 척할 순 없는 거 아니니? 내버려둬. 그애들 자녀의 수는 그애들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둬야지, 우리네 부모가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_「해산바가지」, 193쪽

저도 창환이를 잃기 전까지는 저절로 살아졌어요. 세월이 유수 같았죠. 한참 자라는 아이나 달력을 보지 않고서는 세월이 빠르다는 걸 느낄 겨를이나 어디 있었나요. 너무 빨라 거스르고 싶었나봐요. 젊어 보인다는 소리 듣는 게 제일 기분이 좋았으니까요. 지금은 아녜요.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다는 걸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젊어졌다 좋아졌다, 아니면 어디 아팠느냐, 못쓰게 됐다는 식으로 남의 신체를 가지고 들먹이는 인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_「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52쪽

나는 어머니의 조용하지만 절실한 몸짓을 통해 이 두 죽음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심하게 우리의 일상을 훼방놓았던가를, 그 훼방으로부터 놓여나려는 간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아프게 느꼈다. 그것은 소리없는 통곡이요, 몸짓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정말은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_「부처님 근처」, 284쪽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_「도둑맞은 가난」, 327쪽

비로소 나는 내 아픔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아픔을 정직하게 신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_「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335쪽

쥬디 할머니 |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364쪽 | 1만85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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