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CEO리더십 연구소장·코칭경영원 코치
올해가 저물어간다. 조용히 물어보자. '내가 누군데'의 으쓱거릴 명함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력서의 화려한 경력 말고, 추도사로 남길 경험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자서전에 직함이 아닌 이름을, 하우스가 아닌 홈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질문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연말이면 많은 사람이 한 해를 정리하며 묻는다. "나는 올해 무엇을 이뤘는가." 정작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구인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서 임원 승진에 탈락한 도진우 부장이 퇴직한 선배 김 부장(김낙수)에게 묻는다. "제가 왜 임원이 안 됐을까요?" 김 부장의 대답은 예상 밖이다. "더 중요한 건 왜 임원이 되고 싶었는지 아는 거야. 무얼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알아? 너 자신에게 솔직해져 봐." 이 대화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과 묘하게 겹친다. 1940년대 불황기, 외판원 윌리 로먼은 회사로부터 버려진다. "오렌지의 속만 까먹고 껍질만 내던져 버릴 참이십니까. 사람이 한낱 과일 조각처럼 버려질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얼추 80년의 시대 차이가 있지만 그의 절규는 여전히 유효하다. 김낙수와 윌리 로먼은 같은 증상을 앓았다. 명함으로 사느라 이름으로 살지 못한 것. 남의 평가로 사느라 자신을 잃었던 것.
'세일즈맨'의 주인공 윌리 로먼의 'Loman'은 발음에서 짐작되듯 'low man', 아래로 밀려난 사람이다. 김낙수의 낙수(落水)는 떨어진 물이다. 이름만 놓고 보면 두 인물에게는 이미 '하강'이 새겨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둘은 누구보다 착실했고 한때는 정점을 찍었으며, 자신들의 미래가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보장됐다고 착각했다. 윌리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게 전부야"라고 말했고, 김낙수는 임원만 되면 인생이 만사형통할 것이라 믿었다.
#명함과 정체성, 그리고 홈과 하우스
현실은 냉정하다. 윌리는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퇴출당했고, 김낙수는 경쟁에서 밀려 등 떠밀려 퇴직했다. '진실의 순간'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할 때 닥친다. '세상이 원하는 나'가 '나는 누구인가'를 압도할 때, 윌리와 김낙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명함 속 직함으로 자신을 증명코자 했다. 직함이 내 이름을 압도할 때,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외주화한다. 조직이 불러주는 호칭, 세상이 평가하는 척도가 자신의 모든 것이 된다. 퇴직 후 로먼, 김낙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미뤄뒀던 질문과 마주한다. "나는 누구였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두 사람 모두 집(house)에 목을 맸지만 결말은 달랐다. 윌리는 자가 한 채를 위해 구두창이 닳도록 일했고, 생명 보험금으로 집이라도 유산으로 남겨야겠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자살했다. 반면 김낙수는 서울 자가를 포기함으로써 재기의 토대를 다졌다. 그 차이는 진짜 '집(home)'을 가졌느냐에서 갈렸다고 생각한다. 하우스는 사는 곳이지만, 홈은 사는 것이다. 하우스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홈은 관계로 만들어진다. 윌리의 부인은 사랑했지만 지지대가 되지 못했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허세와 이중성에 지쳐 외면했다. 김낙수를 절망에서 붙잡아 올린 것은 '서울 자가'가 아니라 가족이었다. 부인은 의연하게 하우스 포기를 결정했고 생계 전선에 나섰으며 남편에게 용기를 줬다. 2막의 성공은 능력보다 관계의 온도가 결정한다. 삶이 무너질 때 나를 잡아주는 손이 있는가. 그 차이가 짠한 윌리와 당당한 김낙수를 갈랐다.
#연말의 초대
올해가 저물어간다. 조용히 물어보자. '내가 누군데'의 으쓱거릴 명함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력서의 화려한 경력 말고, 추도사로 남길 경험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자서전에 직함이 아닌 이름을, 하우스가 아닌 홈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질문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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