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농촌에서는 '경작' 그 이상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 생산 활동을 넘어, 농업의 문화적 가치를 재해석하고 확산시키려는 청년 농부들의 커뮤니티 실험이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먹거리 생산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농업을 고민하고 이를 도시와 연결해가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농게더링'은 그 중심에 선 프로젝트다. '뭐하농'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창의적 활동, 디자인, 교육, 공간 기획 등을 통해 '농크리에이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농촌에서의 삶을 콘텐츠로 전환하고, 지역과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이 실험을 이끄는 이는 바로 이지현 '뭐하농' 대표. 귀농 3년 차 무렵 "농업의 변화를 위해선 농부가 뭐든지 해야겠다"는 고민에서 시작된 이름 '뭐하농'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선언이었다. 농업의 확장성과 커뮤니티의 힘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농부적 삶'을 기획하다
'뭐하농'의 대표 거점은 충북 괴산에 위치한 복합공간 '농밭그라운드'다. 이곳은 단순한 농경지나 체험장이 아닌, F&B 공간(뭐하농하우스), 공유 창작 오피스, 농작업 실습장, 그리고 '모두의 밭'이라 불리는 공유생산공간까지 다양한 기능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복합 커뮤니티 공간이다.
청년 귀농인들이 농업에 필요한 감각을 쌓고, 도시민들과 농업의 가치를 공유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특히 '모두의 밭'은 생태순환 원리에 기반한 디자인 경작 모듈을 도입해 주목받고 있다. 병해충 방지와 작물 생장 촉진을 위한 '동반식물(companion planting)' 조합이 적용돼 농약이나 화학비료, 비닐 없이도 자연의 힘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
이 대표가 말하는 '농부적 삶'은 생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며 자신의 삶을 경작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대표는 "흙을 만지는 게 단순히 노동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인 체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되면 농업을 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흩어진 농촌을 모으다…'농게더링'의 탄생과 진화
이런 철학은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농게더링'으로 이어졌다. 귀농·청년농 친구들과의 네트워크에서 출발한 이 모임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농촌 기반 크리에이터들이 한데 모인 연대체로 발전했다.
이 대표는 "서로 SNS 팔로우는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한번 모여보자고 했는데,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에서 80명 넘게 모였다. 그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싶었다. 되게 위로가 되고 기뻤다"고 회상했다.
이후 농게더링은 연 2회 정기 모임을 열며 확장됐고, 지난해에는 하동에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참석한 간담회도 열렸다. 올해 9월에는 일본의 유사 단체를 초청해 첫 국제 교류 포럼도 계획 중이다. 이 대표는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단체를 직접 찾아갔는데, 우리가 하는 고민과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데, 농촌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고민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넓은 이야기로 확장해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앞으로는 농게더링을 법인화해 교육, 커뮤니티, 포럼 등 활동을 체계화할 계획이다. 각 지역에 흩어진 농촌 콘텐츠 창작자들이 보다 안정적인 플랫폼에서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실험을 사업으로, 철학을 구조로
이 대표는 실험을 단기 이벤트로 끝내지 않기 위해 사업 구조를 다각화하고 전문화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는 "초기에는 공간 운영, 교육, 디자인, 콘텐츠 행사까지 다 해봤다. 초반에는 우리 역량을 보여주기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 인식은 점점 흐려졌다. 카페 운영으로만 보는 사람도 있었고, 체험농장 정도로만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각 영역을 명확히 분리했다. 농산물 기반 제품 사업자는 별도로 두고, 교육과 커뮤니티는 농게더링, 콘텐츠 브랜드는 '하우스시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우리가 가진 제일 큰 강점은 공간이다. 여기에 온 사람들이 그냥 한 끼 먹고 가는 게 아니라, 뭔가 이야기를 받아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싶었다. 농부의 철학이나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흐름을 공간에 녹이려 했다"고 말했다.
공간 중심의 체험형 콘텐츠는 도시민들과의 접점을 넓히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이 대표는 "카페에 커피 마시러 왔다가 우연히 밭 체험도 하게 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농업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식을 바꾸는 일은 그렇게 작고 사소한 계기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농업, 삶을 담는 그릇으로
이 대표가 처음 농업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그의 바람은 단순했다. 농사짓는 일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단순히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이 대표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존중하려면, 결국 그 일 자체가 멋있어 보여야 했다. 그게 매력적으로 보여야 사랑받고, 그래야 오래 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농업은 더 이상 먹거리를 생산하는 기술이나 산업에 머물지 않는다. 흙을 만지고, 계절의 흐름에 맞춰 움직이는 일은 곧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 속엔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충만한 감각들이 숨어 있다. 이 대표는 "농부는 매일 자연과 스킨십하면서 산다. 노동은 고되지만, 삶에 대한 자존감은 정말 높다. 그런 순간들을 도시 사람들도 일상 속에서 조금씩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그 연결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지금 뜨는 뉴스
농업을 다시 정의하는 일은 곧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땅에 무엇을 심느냐를 넘어, 자신이 어떤 삶을 가꾸고 싶은지를 묻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뭐하농'과 '농게더링'은 농업이라는 단어의 지평을 넓히는 하나의 실험이자 제안이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