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 생략 '기소유예합의'
한국지질연구원 박사도 연루
영국 중대비리수사청(Serious Fraud Office·SFO)이 최근 기소유예합의(DPA) 조건 위반 혐의로 자국 기업 '거랄프시스템스(Guralp Systems Limited·GSL)'을 재판에 넘겼다. 영국에서 DPA 제도가 2014년 도입된 후 DPA 불이행을 사유로 기업을 법정에 세운 첫 사례인데, 한국인이 연루된 부패 사건이라 한국에서도 해당 사건이 다시 환기되고 있다. DPA는 기업이 부패·사기 사건에서 형사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유죄 인정, 범죄 수익 환수, 내부 통제 개선 등의 조건 이행을 전제로 한다. 이행이 미흡하거나 지연될 경우에는 언제든 기소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은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진연구센터장으로 재직하던 지헌철 박사는 2002년부터 2015년까지 GSL로부터 약 100만 달러를 '자문료' 명목으로 받았다. 대부분은 미국 내 본인 명의 계좌로 송금됐고, 일부는 영국에서 현금으로 직접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1976년에 설립된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정부 출연 연구기관으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연구직 인력은 대부분 '공무원'으로 의제된다.
SFO는 GSL이 지 박사의 영향력을 이용해 한국 내 납품 계약을 따내기 위해 뇌물을 제공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GSL은 국제 반부패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및 영국 뇌물방지법(UK Bribery Act) 위반 혐의를 받았다. 2019년, SFO는 기소를 유예하는 조건으로 GSL과 DPA를 맺었다. 주요 합의 조건은 ▲약 206만 파운드(약 36억 원) 부당이익 환수 ▲내부 통제 시스템 개선 ▲정기 보고 의무 이행 등이었다. GSL은 부패 사실을 자진 신고하고 관련 임직원을 퇴직시켰다. 재무 상황을 감안해 벌금 부과 없이 부당 이익만 환수하는 조건에 합의했다.
그러나 GSL은 DPA 이행 과정에서 주요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정기 보고 의무를 누락했고, 부당 이익 환수금 납부도 지연됐다. SFO는 2024년 11월 영국 런던 사우스워크법원에 GSL을 기소했다. 'DPA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기소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지 박사는 미국에서도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돼, 2017년 10월 미국 LA 연방법원에서 징역 14개월과 벌금 1만5000 달러, 보호관찰 1년을 선고받았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지 박사가 기소되자마자 그를 해임했다.
이번 사건은 DPA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영국 사정당국의 본격적인 조치로 해석된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의 준법 경영 체계 전반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영국 현지에서 활동 중인 김인수 영국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기업이 DPA를 체결한 뒤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정식 기소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그동안은 기업만 처벌받고 이사진 등 책임자는 면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책임자 개인에 대한 형사 처벌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정부와 법원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여부에 따라 해당 담당자까지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했다.
송유진 법무법인 지음 영국 변호사도 "이번 사건은 SFO가 DPA 이행 여부를 실질적으로 감독하고 있으며 단순한 면책이 아닌 지속적 법적 관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내부 통제의 실효성과 이행 증빙이 핵심이며 DPA 체결 이후에도 정기 보고와 조직 내 투명한 소통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형식적 보고에 그치지 않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를 투명하게 개선하고 보고하는 자세가 오히려 리스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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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법률신문 기자
※이 기사는 법률신문에서 제공받은 콘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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