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땅 기운 담아…역사 반복되지 않길"
비상계엄 선포 여파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추운 날씨에도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을 위해 계엄군의 딸이라고 밝힌 이가 커피 1000잔을 선결제한 사연이 전해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의 한 카페는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국회의사당 맞은편에 위치해 촛불시위 시민들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선결제로 후원해주신 감사한 분들이 너무도 많았다"며 "그러던 중 해외에 계신 교포분으로부터 선결제 관련 문의가 왔다. 유선을 통해 후원하는 이유와 타국에서도 실시간으로 한국의 정권 심판에 대해 관심이 크다는 것을 듣게 됐다"고 그리다씨(활동명)의 사연을 소개했다.
프랑스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30대 여성 그리다씨는 전날 자신의 SNS에 '아침이슬로 다시 만난 세계: 어느 계엄군 딸의 고백문 그리고 1000잔의 커피'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자신의 어머니가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정보병이라고 밝힌 그리다씨는 "엄마는 꿈도 많고 공부까지 잘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엄마의 길을 막았다"며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군대뿐이었다"라고 털어놨다.
그리다씨는 "차별과 억압, 꿈과 자유가 이상하게 뒤엉킨 혼란스러웠던 그때의 어느 날, 엄마는 광주로 가 그곳에 모인 빨갱이들을 척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정보병이었던 엄마는 거리로 나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함성과 총성, 찢어질 듯한 비명과 통곡, 끌려오는 무고한 사람들의 부서진 몸과 얼굴이 지옥처럼 엄마를 짓눌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여름, 방학을 맞아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 엄마 집을 찾았다. 손자, 손녀를 재우고 우리 모녀는 까마득히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며 엄마의 처녀 시절까지 거슬러 갔다"며 "엄마의 군대 시절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여군이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날 엄마가 들려준 광주의 이야기는 아직도 엄마의 주름진 손마디를 얼어붙게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본 '택시 운전사'와 '서울의 봄'은 더 이상 멀고 복잡한 한국 현대사의 한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로 와닿는, 내 가족의 이야기였다. 14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엄마는 왜 노래 '아침이슬'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을까. 광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미안함,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그들 곁에 있지 못했던 죄책감, 진실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리다씨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내 나라에 더 나은 시대를 만들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나아가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세계를, 지구를 물려주고 싶다.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이전보다 더 찬란하고, 더 따뜻하기를.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자들이 이기지 않기를. 더 이상 쓸쓸하거나 외로운 사람이 없기를"이라며 "혁명의 땅 프랑스에서, 그 기운을 담아 천 잔의 커피를 보낸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프랑스에서도 수천 개의 빛을 뿜어내는 에펠탑 앞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마음을 보태겠다. 따뜻한 커피에 여의도에 있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래서 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다"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그리다씨의 사연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를 모으자 그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한 일인데 수많은 댓글로 제가 오히려 큰 선물을 받는다"며 "원치 않게 역사의 반대편에 계셨던 어머니의 광주에 대한 업보는 제가 평생을 두고 사죄드리고 갚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국회는 14일 오후 4시 본회의를 열고 두 번째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표결한다. 이번 탄핵안은 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등 야 6당이 지난 12일 발의한 것으로 1차 탄핵안과 달리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내란 혐의에 초점을 맞췄다.
국민들도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다씨 외에 가수 겸 배우 아이유·그룹 소녀시대 소속 유리도 집회에 참여한 팬들을 위해 국회 인근 가게들에 선결제했다. 연예인 외에도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다수의 일반 시민들이 집회 참여자들을 위해 국회 인근 가게에 선결제해놓고 국회의사당 역 등에 물품을 무료로 나눠주는 등 미담이 쏟아지고 있다.
구나리 기자 forsythia2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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