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집권 1주년
정부 지출 '전기톱' 삭감에 머스크도 감탄
극약처방에 빈곤율, 실업률 상승 부작용도
지난해 12월 전기톱을 휘두르며 대대적인 '재정 다이어트'를 예고했던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집권 1주년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우려와는 달리 인플레이션은 10분의 1수준으로 완화됐고 증시는 폭등했다. 미국에 신설될 정부효율부(DOGE)의 예고편을 보는듯한 공무원 감축과 지출 삭감에 아르헨티나는 12년 만에 첫 월간 재정 흑자도 달성했다. 다만 허리띠를 과도하게 졸라맨 탓에 위축된 내수와 여전히 높은 빈곤율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밀레이 대통령의 '전기톱 개혁'은 성공 가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남미의 트럼프' 밀레이의 '전기톱 개혁'
지난 10일(현지시간) 취임 1주년을 맞이한 밀레이 대통령의 정책 노선은 유세 때부터 한결같았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만성적 재정적자와 이를 메꾸기 위해 공급된 유동성이 물가를 폭등시키는 악순환을 지적하며 대대적인 정부 지출 삭감을 예고했다. '중앙은행 철폐', '달러화 법정통화 채택'과 같은 극단적인 공약에도 불구하고 55%가 넘는 유권자가 밀레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전임 페로니즘(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추종하는 좌파 포퓰리즘) 정권들이 나라에 빚더미를 안겼다는 취임사로 포문을 연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기존 18개였던 정부 부처를 절반으로 줄이는 법안에 서명하며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과거 진보 정권에서 권한이 비대해진 환경부, 여성인권부, 사회개발부, 공공사업부 등이 통폐합 대상이 됐다. 감원 명단에 오른 공무원도 7만명에 이른다.
밀레이 대통령은 기후 위기 회의론을 피력해온 '남미의 트럼프'답게 산림 및 빙하 보호에 관한 환경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게 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조차 "인상적인 진일보"라며 혀를 내둘렀다. 비벡 라마스와미 역시 "미국도 밀레이 스타일의 지출 삭감이 필요하다. 단, 더 강력하게(on steroids)"라고 강조했다.
"돈 새는 수도꼭지를 잠가라"
밀레이 대통령의 '톱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구매력이 땅바닥까지 떨어진 페소화와 동이 난 외환보유고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과거 무분별한 돈 풀기로 화폐 가치가 폭락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고정환율제도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시장 가치와 3배 가까이 괴리된 정부의 공식 환율은 철저히 외면받았고 외환 거래 대부분이 암시장에서 이뤄졌다.
이에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달러당 366.5페소로 고정된 환율을 800페소로 조정했다. 페소화 가치를 50% 넘게 떨어뜨린 셈이다. 화폐 가치가 낮아질수록(환율이 오를수록) 수출이 개선되니 이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채우겠다는 계산이다. 크롤링 페그(공식 환율을 작은 폭의 범위 안에서 수시로 변경하는 제도)의 일환으로 매달 페소화 가치를 2%씩 평가절하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페소화 가치 하락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겨 서민의 고통은 가중되겠지만, 미래를 위해선 불가피한 출혈이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과감한 이니셔티브"라며 호평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아르헨티나 정부의 공식 환율과 암시장에 성행하는 비공식 달러(블루 달러) 환율의 격차는 빠르게 좁혀졌다. 밀레이 행정부의 경제 사령탑인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의 전략도 빛을 발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집 안이나 해외 계좌에 숨겨둔 달러를 자국 은행에 예치하도록 세제 혜택을 제공해 150억달러(약 21조원)를 끌어모았다. 그 결과 암시장에서 달러 수요는 줄어들고 환율 상승 압박은 완화됐다고 외신은 전했다.
'MAGA'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연간 130~140%대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과 40%대에 육박하는 빈곤율에 몸살을 앓던 아르헨티나는 밀레이 대통령의 등장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해 12월 26%에 달했던 전월 대비 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2.4%까지 떨어졌다. 2020년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뼈를 깎는 긴축 끝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 1월 12년 만에 첫 월간 재정 흑자를 달성했으며, 부실채권으로 평가받는 장기국채 가격은 3배가량 상승했다. 아르헨티나 대표 주가지수인 메르발 지수 역시 올해 들어 140% 가까이 급등했다.
주요 외신은 "'미스터 마켓'(Mr. Market) 밀레이가 중력을 거스르는 업적을 이뤄냈다"며 "그의 추종자들은 'MAGA'(Make Argentina Great Again·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는 변호사 호세 보쉬는 "나라가 쇠퇴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지만 이제 우린 올바른 길 위에 있다"며 "물가는 안정되기 시작했고, 잃었던 급여는 예전 수준을 회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JP모건의 파쿤도 고메스 미누진 아르헨티나 지사장은 "아르헨티나라는 회사가 1년도 채 안 돼 '챕터11'(기업회생을 위한 미국의 법정관리 조항)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강조했다.
'극약처방'의 부작용
디폴트(채무불이행)만 9번을 겪은 아르헨티나가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해 '극약처방'을 내린 만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상당했다. 연금과 공무원 급여를 동결하고 각종 에너지·교통 보조금을 삭감한 탓에 국민들의 가처분 소득이 급격히 감소했고, 이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졌다. 현지 소비 전문 컨설팅 업체 스센티아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본 생필품에 속하는 식료품, 위생·청소용품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0%가량 줄었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주식인 소고기 소비량마저 3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삶도 팍팍해졌다. 지난 9월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에 따르면 올해 아르헨티나의 상반기 빈곤율은 52.9%로, 지난해 하반기(41.7%)에서 11%포인트 넘게 상승했다. 이는 20년 만의 최악으로, 올해에만 약 340만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셈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지난 2분기 실업률도 전년 동기 대비 1.4%포인트 오른 7.6%까지 치솟았으며, 지난해 -1.6%였던 경제성장률은 올해 -3.7%(최종 전망치)까지 뒷걸음질 쳤다.
아르헨티나의 진보성향 싱크탱크인 라틴아메리카지정학센터(CELAG)의 알프레도 세라노 만실라 대표는 밀레이 대통령 집권 이후 나타난 경제지표 호조를 '데드 캣 바운스'(주가가 급락 후 일시적으로 반등하는 현상)에 비유하며 이러한 분위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밀레이는 아르헨티나 미시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며 "(밀레이의 정책은) 유효 기간이 매우 짧은 모델"이라고 지적했다.
대세는 '작은 정부'
이처럼 명암이 뚜렷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밀레이 대통령은 여전히 50%대 수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고통은 미래를 위한 과도기라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요 외신은 "밀레이가 장기적으로 성공한다면 수년간 '큰 정부'를 거쳐온 아르헨티나의 정치 지형도가 변화할 것"이라며 "내년 중간 선거에서 더 많은 의석을 얻고 개혁의 동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밀레이 대통령이 보여온 친미 행보를 고려할 때 내년 1월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와도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플로리다에 위치한 트럼프 당선인의 마러라고 저택으로 날아가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대선 이후 트럼프 당선인을 만난 국가 정상은 그가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현지 언론들은 IMF에 큰 입김을 불어 넣는 미국과 밀착해 재정적 이득을 얻으려는 전략적 행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IMF에서 440억달러(약 63조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아 원리금을 매월 갚고 있는 상태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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