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가려운 부분 긁어주는 사모펀드와의 비밀계약
'주주 간 계약' 공시의무 없어 결과적으로 시장교란
거래 투명성·투자자 보호 등 자본시장 플레이어 역할 필요
기업과 사모펀드(PEF) 간 다양한 형태의 협력이 늘고 있다. 행동주의펀드나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상호협력을 더욱 강화하는가 하면 기업승계의 부담을 덜기 위한 거래도 늘고 있다. 기업공개(IPO) 및 상장폐지 과정에서 수익성 극대화를 위한 새로운 계약행태도 관측된다. 기업과 PEF 간의 협력이 이처럼 다양한 계약 형태로 자본시장에 표출되면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할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규모 자본을 가진 PEF와 기업 간 은밀한 계약이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탈법·편법의 행태로 변질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기업과 PEF 간의 밀회…소액주주·자본시장 교란 '사각지대'
국내 PEF는 지난 20년간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글로벌 PEF와 비교하면 여전히 초기 단계지만 이제 시장 규모는 물론 운용사(GP)의 운용 측면에서도 일정한 궤도에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규모 면에서는 2004년 말 총 4000억원 규모로 두 개의 펀드가 결성된 이후 2023년 말 기준 출자 약정액은 136조4000억원, 펀드 수는 1126개로 급성장했다. 이처럼 대규모 자금력을 갖춘 PEF가 자본시장의 주요 플레이어이자 기업의 해결사 역할을 자청하면서 PEF와의 은밀한 계약이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불거진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PEF 간의 비밀약정이다. 방 의장은 2020년 하이브 상장 1~2년 전 PEF 3곳과 조건부 계약을 맺었다. 내용은 '일정 기간 내에 IPO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투자 이익의 30%가량을 받는 것인데, 이 계약 내용을 상장 과정에서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EF들은 보호예수 제한 없이 상장 첫날부터 지분을 대규모로 매각했고, 방 의장은 이들 PEF로부터 약 4000억원을 받았다. 하이브는 상장 첫날 장중 공모가 대비 160% 급등했지만 PEF 매물이 쏟아지며 1주일여 만에 주가가 최고가 대비 반토막 났다. 일반 투자자들이 손실을 보는 사이 PEF와 최대 주주는 비밀계약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번 사건을 두고 투자업계 내부에서도 PEF와 대주주 간의 비밀계약이 자본시장 일반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자본시장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계약은 자유지만 적어도 기업공개를 결정한 상장사라면 다른 주주들과 일반투자자들에게도 투명하게 알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자 보호에 충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IPO에 정통한 벤처캐피털 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하이브 건은 업계에서 보기에도 좀 이례적"이라며 "옵션(조건)계약을 했으면 보통 다른 주주들에게도 알려주는데 비밀로 한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옵션계약으로 발생한 이익을 회사의 이익이 아닌 개인 대주주의 이익으로 돌린 부분도 문제"라며 "다만 이런 것들이 법적·정량적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정성적인 부분이라 책임을 묻기는 애매하다"고 말했다.
국내 연기금 한 고위관계자는 "주주 간 계약을 맺을 때 각종 조건을 포함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투자자 보호 위반, 공모가격에 부당한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서는 감독 당국이 한 번 살펴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만 "명확한 규제 위반이라기보다는 괘씸하기는 하나 처벌하기는 어려운 사각지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 제도상으로는 주주 간 계약 내용에 대한 공시의무가 없으며, 이는 제도의 미비점으로 지적된다. PEF 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하이브 주주 간 계약이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불확실성은 많은 투자자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주고 상장 이후 주가 하락에 영향을 줬다"며 "결과적으로 일반주주가 가져갔어야 할 이익이 방시혁 개인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정보가 공시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논란은 시장의 신뢰를 저하할 수 있다"며 "이런 제도적 미비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현재 금융감독원과 공조해 관련 문제를 들여다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아직 조사 여부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전했다.
경영권 방어·기업승계 등 만능 해결사로 나선 PEF
자본력에 있어서는 은행과 증권사를 능가하지만 규제 측면에서는 사적인 계약의 보호를 강하게 받는 PEF와 기업 간 거래는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PEF 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최근 MBK와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이후 기업과 펀드가 서먹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협력이 더욱 다양한 형태로 늘어나고 있다"며 "적대적인 외국계 펀드의 공격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고자 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기업과 국내 PEF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고 귀띔했다.
공격 대상이 되기 쉬운 상장기업보다는 비상장기업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늘면서 기업들이 PEF의 손을 더 빌리기 시작했다. 이 관계자는 "PEF들이 공개매수 등을 통해서 상장회사를 비상장회사로 전환하는 밑 작업을 해주고, 대신에 해당 그룹의 똘똘한 비상장 계열사를 받는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의 거래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권 방어뿐 아니라 기업승계에서도 PEF와 기업 간 협력이 늘고 있다. 기업 승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속·증여세를 줄이면서도 기업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거래다.
예를 들어 A기업 회장이 자녀에게 B기업을 승계할 때 지분 60%는 아들·딸에게 넘겨주고, 40%의 지분은 PEF에 넘긴다. 5년 정도 PEF와 공동으로 지분을 가지고 경영을 하면서 기업가치를 높인 후 매각해서 차익을 나눠 갖는 방식 등으로 세금을 회피할 수 있다.
기업들은 '유동성 악화'…시장 우위에 선 PEF
기업들은 경기침체로 현금 창출이 어렵고 유동성이 부족한 반면 PEF로는 자금이 넘치게 쏠리면서 당분간은 PEF 우위의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에 따라 불공정거래 등에 대한 감독 당국의 모니터링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우위가 아닌 펀드 우위 시장이 형성된 만큼 PEF 들이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공정 행위를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시점이 됐다"며 "PEF의 공개매수나 인수 이후 구조조정 등 전 과정에서 투명성과 건전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과 PEF의 협력은 한국 자본 시장을 발전시키고 서로 성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100조원을 넘어 150조원을 바라보는 규모로 성장한 PEF가 자금 규모에 맞는 거래 투명성을 갖추고, 투자자 보호를 위해 노력하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기업 간 거래가 아니라 자본이 기업을 인수하는 시대가 도래한 만큼, 그간 시장의 모험자본 역할에만 충실했던 PEF 들의 사회적 역할도 더욱 커지고 있는 셈이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오유교 기자 5625@asiae.co.kr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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