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스페인 '마칸(Macan)'
베가 시실리아와 로칠드 가문의 합작 와인
최상급 리오하 와인 목표로 의기투합
생산량 통제로 포도의 집중도 끌어올려
1913년 7월 21일,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혼자서는 삶의 풍파를 견뎌낼 수 없다며 당시 연인이었던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와의 결혼을 고민했다. 그는 혼자서는 인생에 가해지는 공격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부담을 이겨낼 수 없고, 홀로 세월을 견디며 늙어갈 자신도 없다고 일기장에 고백했다. 하지만 카프카는 결국 바우어와 결혼하지 않았다. 경계가 무너진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카프카는 결혼을 통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삶의 풍파를 함께 견뎌낸다는 긍정적인 기대보다 구분이 모호한 한 몸이 된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셈이다.
레바논 출신 작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도 카프카의 우려를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예언자(The Prophet)'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되 서로를 소유하려 하지 말라"라고 썼다. 고결하고 위대한 결합은 서로 간의 거리를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는 이야기다.
프랑스어로 결혼 또는 결합을 뜻하는 단어 '마리아주(mariage)'는 유독 와인과 엮여 사용되는 일이 잦다. 술과 음식, 특히 와인과 음식 간의 조화를 뜻하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 어원에 맞게 두 가문이 마리아주를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와이너리가 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모호한 한 몸이 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서로 간의 거리를 존중하며 둘의 기대와 바람을 선명히 담긴 와인을 차근차근 빚어내고 있는 곳, 스페인 리오하(Rioja) 지역의 '마칸(Macan)'이다.
베가 시실리아와 로칠드 가문의 합작 와인
마칸은 20년 전 시작됐다. 2004년 프랑스 보르도 리스트락-메독(Listrac-Medoc) 지역의 '샤토 클락(Chateau Clarke)' 와이너리 소유주인 벤저민 드 로칠드(Benjamin de Rothschild)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이너리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의 소유주인 파블로 알바레즈(Pablo Alvarez Mezquiriz)와 처음 만난다.
세계적인 금융 가문 로스차일드의 벤저민은 당시 각기 다른 지역에서 4개의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파블로에게 다음 프로젝트에 관해 묻는다.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에 기반을 두고 있는 파블로는 스페인 최고의 와인 산지인 리오하에서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보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마침 리오하의 테루아에 관심을 두고 있던 벤저민은 두 가문의 자본과 와인 양조 기술이 더해진다면 '최고의 리오하 와인'은 실현 가능한 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로의 뜻을 확인한 두 가문은 빠르게 결합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두 유력 가문이 공동 합작한 마칸의 시작이었다. 정확히 절반씩 지분을 나눠 가진 두 가문은 포도밭 매입부터 시작했다. 파블로와 벤저민의 아내 아리안느(Ariane de Rothschild)는 템프라니요(Tempranillo) 품종 재배에 최상의 환경을 가진 리오하의 세부 산지들을 돌며 최고의 포도밭을 찾아 나섰고, 결국 산 비센테 데 라 손시에라(San Vicente de la Sonsierra)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0㏊에 걸쳐 176개의 플롯의 포도밭을 매입했다.
포도밭 매입 이후 수년간의 연구개발(R&D)을 통해 꾸준히 품질을 끌어올린 마칸은 2009년 첫 빈티지 와인을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4년이 흐른 2013년, 마침내 2009 빈티지 와인 1만6000병이 세상에 공개됐고, 해당 와인은 출시 3주 만에 모두 완판되며 두 가문의 결합에 대한 높은 관심을 증명했다.
자타공인 스페인 와인의 중심, 리오하
리오하는 스페인 북부 에브로강(Rio Ebro) 유역에 펼쳐진 지역으로 스페인 최고의 와인 생산지로 꼽힌다. 리오하는 1925년 스페인 최초로 스페인 정부에서 지정한 와인 등급 기준인 DO(Denominacion de Origen·원산지 명칭 와인) 지위를 획득했고, 1991년에는 처음으로 DOCa(Denominacion de Origen Calificada·특별 원산지 명칭 와인) 등급으로 승격될 만큼 스페인 와인 업계를 선도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리오하는 '리오하 알타(Rioja Alta)'와 '리오하 알라베사(Rioja Alavesa)' 그리고 '리오하 오리엔탈(Rioja Oriental)'까지 크게 3개의 생산지구로 나뉜다. 에브로강 상류에 위치한 리오하 알타는 리오하의 서쪽 지역으로 해발 고도가 500~800m로 세 지역 중 가장 높아 포도가 긴 생장 주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와인은 과실 풍미가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리오하 와인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며, 전통적인 우수 생산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이다.
리오하 알라베사는 에브로강 북쪽 기슭에 위치한 산지로 대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북서쪽의 칸타브리아산맥(Sierra de Cantabria)이 서늘하고 습한 바람으로부터 포도밭을 보호해 주고 있다. 전반적인 기후와 토양은 리오하 알타와 유사하지만 와인은 리오하 알타에 비해 무게감이 있는 게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리오하의 동쪽, 에브로강 하류에 위치한 리오하 오리엔탈은 3개 생산지구 중 고도가 가장 낮고,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가장 따뜻하고 건조한 지역이다. 이러한 기후의 차이로 인해 앞선 두 지역이 템프라니요 생산에 집중하고 있는 데 반해 가르나차(Garnacha Tinta)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생산량 통제로 과실의 집중도 끌어올려"
이 가운데 리오하 알라베사 지역에 자리 잡은 '라 카노카(La Canoca)'는 마칸의 최상급 포도밭 중 한 곳으로 마칸의 포도 재배 철학을 확인할 수 있는 밭이다. 해발 700m 부근에 펼쳐진 라 카노카에선 평균 수령 50년가량의 올드바인(Old Vine·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이 재배된다. 올드바인은 어린나무에 비해 생산량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깊게 뿌린 내린 만큼 토양에 함유된 다양한 미네랄을 흡수해 와인에 복합미를 부여한다는 장점이 있다.
마칸은 올드바인의 생산량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포도의 품질을 끌어올리고 있다. 리오하 지역에선 일반적으로 포도밭 1㏊당 약 6500㎏의 포도를 수확한다. 하지만 마칸은 ㏊당 생산량을 4000㎏까지 줄여 과실의 집중도를 높이고 타닌의 함유량도 끌어올리고 있다. 하이메 로페즈-아모르(Jaime Lopez-Amor) 마칸 빈야드 담당자는 "생산량을 제한하지 않으면 포도 열매 한 알의 크기가 작고, 그 안에 포함된 수분도 적은데다 산도까지 튀며, 풀냄새가 도드라지는 아로마를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타닌 역시 생산량이 많을수록 거칠어지는데, 이는 마칸이 지향하는 부드러운 타닌과는 반대되기 때문에 생산량 제한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생산량 제한은 가지치기를 통해 이뤄지는데, 포도나무 한 그루당 5개의 가지만 남기는 방식으로 생산량을 통제한다. 최상급 와인 생산을 목표로 하는 만큼 포도밭 내 가지치기를 비롯한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로페즈-아모르 빈야드 담당자는 "가지치기의 흔적을 보면 모두 비슷한 사이즈에 비슷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그만큼 섬세하게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수확 역시 수작업으로 이뤄지는데, 포도가 수확과 운송, 보관 과정에서 짓이겨져 상하지 않도록 12㎏ 용량의 작은 용기에 나눠 와이너리로 옮겨진다.
"따로 또 같이" 두 가문의 위대한 결합물, 마칸
마칸은 스페인과 프랑스 보르도의 가문이 결합해 탄생한 와이너리인 만큼 프로젝트 초반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지향했다. 이 과정에서 메인 와인과 세컨드 와인 총 2종으로 구성되는 보르도 와이너리의 전통에 따라 메인 와인인 '마칸(Macan)'과 세컨드 와인 '마칸 클라시코(Macan Clasico)' 두 종으로 라인업을 구성해 생산하고 있다. 다만 품종 간 블렌딩을 통해 매년 최적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보르도와 다르게 마칸의 두 와인은 모두 스페인 토착 품종인 템프라니요 100%로 만들어진다.
마칸과 마칸 클라시코에 사용되는 포도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토양의 미네랄과 지층의 구조, 수분 보존 정도 등을 분석해 구분한다. 라 카노카처럼 칸타브리아 산과 가까운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자란 포도는 마칸에,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에브로강 인근에서 자란 포도는 마칸 클라시코로 들어가게 된다. 호라시오 바살로(Horacio Vasallo) 마칸 수출 담당자는 "산 지역에서 재배되는 포도의 경우 미네랄이 더 강조되는 편이라면, 강 인근 지역에서 재배되는 포도는 과실향이 강조된다"고 설명했다.
두 와인은 양조 과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마칸은 클래식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만큼 오크통에서, 마칸 클라시코는 상대적으로 포도 본연의 과실향을 살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통에서 알코올 발효를 진행한다. 발효는 두 와인 모두 1만 리터 크기의 대형 탱크에서 10~12일가량 이뤄진다. 이후 젖산 발효 단계에서도 마칸 클라시코는 스틸 탱크에서, 마칸은 30%는 새 오크통에서 나머지 70%는 스틸통에서 1~2개월간 진행한다.
이 같은 차이는 숙성 과정까지 이어진다. 마칸은 통상 14~16개월 프렌치 오크통에서 새 오크와 한 번 사용한 오크의 비율을 7대 3 비율로 숙성을 진행한다. 반면 마칸 클라시코는 4000ℓ 크기의 푸드르(Foudre·대형 오크통)와 새 프렌치 오크통, 마칸을 숙성시켰던 오크통 그리고 아메리칸 오크통까지 총 4가지 숙성 방법을 빈티지에 따라 다르게 혼합해 가져간다. 이후 병 숙성도 마칸은 3년, 마칸 클라시코는 2년을 진행한다.
마칸은 로칠드와 알바레즈 두 가문의 결합으로 탄생했지만 와인 양조는 전적으로 알바레즈 가문이 담당하고 있다.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모호한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마칸의 와인은 장기 숙성력이 좋은 알바레즈 가문의 베가 시실리아 DNA를 뚜렷하게 품고 있다. 다만 베가 시실리아에서 거뒀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진 않다. 와이너리 설립 초반에는 모든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해 오크 향과 풍미가 진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었지만 점차 오크통 숙성 비율을 낮춰 오크 뉘앙스를 줄여나가고 있다.
바살로 담당은 "베가 시실리아의 탄생지인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은 기온도 높고, 온도 변화도 큰 데 반면 리오하 지역은 기온이 비교적 서늘하고 온도 변화도 안정적인 편"이라며 "리베라 델 두에로의 숙성방법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와인이 거칠어지고 지루해지는 데다 최근 와인 양조의 트렌드와도 멀어지게 돼 지역의 특색에 맞게 최적의 양조법으로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과정을 합의된 의사결정에 근거해 진행하기보다는 각자의 영역과 스타일을 존중하고 일정한 거리가 유지한 것이 결과적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와인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로칠드와 알바레즈 가문의 위대한 결합이 20년을 넘어 오랜 기간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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