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규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
2014년 건강 회복 위해 걸으며 복귀 의지 다져
평균적 사람이 꾸준히 돈 버는 방법 제시하려 노력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의 균형 잘 맞추며 살아야”
"바로 여기에요. 조금만 더 힘을 내요!" 남산서울타워를 100m 앞에 두고 퍼져버린 기자들을 배재규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가 격려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에 '다 왔구나' 싶었는데 가파른 계단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벅지가 후들거리고,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그때, 남산타워가 보였다. 오늘 가기로 했던 가장 높은 목적지다.
남산골공원-목멱산 호랭이-남산서울타워-국립극장 2시간 걸어
충무로역 3번 출구에서 배재규 대표를 만나 남산골공원-목멱산 호랭이-남산서울타워-국립극장까지 약 2시간 동안 함께 걸었다. 배 대표를 살린 남산 산책길이다.
"이 길은 정말 제가 수백번 걸었어요. 여름이면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햇빛도 안 들고 한 바퀴 돌면 시원해요."
"여기가 예전에 많이 걸으셨던 그 길 맞아요?"(기자)
"맞아요, 맞아. 여기부터 남산타워까지 올라갔다가 국립극장까지 내려오는 길이에요. 내가 전 직장에 있을 때 몸이 아파서 6개월 휴가를 받았어요. 그때 체력이 많이 약해졌었는데, 이 길을 걸으면서 힘을 냈어요. 걸으면 의욕이 막 솟아나더라고."
배재규 대표는 자본시장에서 '한국 ETF(상장지수펀드)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액티브 상품 중심이던 2002년 국내 펀드시장에 최초로 ETF를 선보였다. 이어 2009년과 2010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인버스 ETF와 레버리지 ETF를 내놔 또 한 번 ETF 시장의 지평을 넓혔다.
1961년생인 배 대표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9년 한국종합금융 증권신탁부 입사를 시작으로 금융 업계에 발을 들였다. 2000년 삼성투자신탁운용(현 삼성자산운용)으로 자리를 옮긴 배 대표는 코스닥팀장·인덱스운용본부장을 거쳐 2007년 ETF운용팀장, 채권·패시브·해외투자·자산배분운용총괄 부사장까지 역임했다.
"2014년에 잠깐 쉬고 있을 때 미래(미래에셋자산운용)가 막 치고 올라오더라고요. 당시 사장님이 안 되겠다고 빨리 나오라고 해서 서둘러서 몸을 만들었죠."
남산 산책로 단골 찻집에서 잠시 휴식
충무로역에서 시작된 걷기는 한옥마을이 있는 남산골공원을 지나 남산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배 대표의 단골 찻집 '목멱산 호랭이'가 보였다.
"여기서 인삼차 한잔하고 가시죠."
배 대표는 인삼차가 메뉴판에서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 대표의 이야기는 찻집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회사를 잠시 쉬는 시간 동안 오히려 의욕이 더 솟구쳤다고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후회가 되기보다는 일에 대한 더 강력한 의지가 샘솟았다.
"남들은 몸이 좀 아프고 그러면 일이나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한다지만, 저는 반대로 내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뭔가는 이뤄야겠다.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잘 살아야겠다고. 악착같이. 남산길을 걸으면서 계속 그런 의지를 다졌어요."
배 대표의 남다른 도전 의식과 끈기는 그의 아버지가 심어준 자산이다.
"개인적인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부자였단 말이에요. 우리 집 건너편에 논이 큰 게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못자리(볍씨를 뿌려 모를 기르는 곳)였어요.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나가서 학교 가는 시간에 씨름을 시켜요. 저는 아직 입학도 안 했는데. 학교 가는 형들을 붙잡고요. 나보다 큰 형들이랑 씨름하던 버릇이 남아서 포기를 몰라요."
키 큰 형들과 씨름 시킨 아버지…도전과 끈기 익혀
그는 지난해 2월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으로 공식 취임하며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1974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자산운용사이지만 현재 순자산총액(AUM)은 52조원대로 업계 7위다. 과거 삼성자산운용·미래에셋자산운용과 함께 '업계 3강'으로 불렸지만 공적기금 운용사 지위가 사라진 데 이어 펀드 시장이 직접투자·ETF 등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위기의 한국투자신탁운용에 지난해 2월 배 대표가 취임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배 대표는 국내 최초의 ETF를 최고로 만든 경험을 살려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달라요. '넘버2'와는 달리 결정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제가 정말 바랐던 부분입니다."
올해 재신임을 받은 배재규 대표는 한투운용의 ETF 브랜드 'ACE'를 앞세워 자신의 '전공과목'이라 할 수 있는 ETF 점유율 높이기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지금부터가 배 대표에게는 가파른 계단길이다. 차 한잔 하고 다시 길을 나서니 평탄한 산책로가 끝나고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험난한 계단길이 보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 길입니다. 이런 계단을 걸으면 노폐물이 쫙 빠집니다. 몸에 피가 확 돌아요. 갑시다."
처음에는 걸을 만하던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지자 허벅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기자들이 너무 힘들어하자 배 대표는 "다 와 갑니다, 저기만 넘으면 됩니다"라는 '착한 거짓말'로 독려했다. 날쌘 배 대표를 따라 허우적거리면서 올라 가다 보니 서울 시내 전경이 다 보이는 평지와 벤치가 나타났다.
"여기서 사진 한 번 찍고 가족들한테 보내기도 하고 그랬죠. 여기 벤치에서 쉬다 가면 돼요. 조금만 쉬면 다시 올라갈 수 있어요."
배 대표의 말대로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올라가니, 마침내 남산타워가 눈앞에 펼쳐졌다. 남산타워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다시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저기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할 때도 있고."
"상대가 나를 찾도록 만들어라"
정상에서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레 스타벅스의 임대료 정책으로 흘렀다.
"목 좋은 곳에는 항상 스타벅스가 있잖아요. 임대료 정책 덕분이죠. 스타벅스는 매출액의 10~20% 정도를 월세로 냅니다. 매출과 연동됩니다. 그러니까 경치가 좋은 데 들어가면 많이 팔리고,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더 많이 줄 수 있어요. 건물주들이 서로 들어오라고 하는 거죠.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달라요. 내가 비싼 임대료를 내고 좋은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상대방이 나를 찾게 만드는 거죠."
남산타워를 보고 내려오는 길은 평탄했다. 내려오는 길의 대화 주제는 커피 맛, 디카페인 커피 추출 방식, 챗 GPT 등으로 옮겨갔다.
"디카페인이 추출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길래 내가 챗 GPT에 물어봤어요."
"아니, 그런 걸 왜 물어보셨어요."(기자)
"아, 밤에 챗 GPT랑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한 시간이 그냥 가요. 궁금하잖아. 답변이 오면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저는 유료로 계속 쓰고 있어요."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이동통신 전시회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23)에 다녀온 배재규 대표는 이번 MWC를 요약해달라고 챗 GPT에 주문했다. '그건 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정보가 2021년까지 밖에 아직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챗GPT가 뭐라고 하냐면 그전에 개최됐던 MWC 정보로 봐서는 MWC 2023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똑똑해요."
그는 또 챗GPT에 '미래에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요인 5가지를 알려달라'고도 했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생명과학,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기억이 안 나네요. 오늘 밤에 또 물어보면 되지(웃음). 언제든지 물어보면 되니까. 예를 들면 그래서 '왜 블록체인이냐'라고 물어보면 또 대답해주는 거죠. 그러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가요."
"창의성은 편집과 연결성…챗GPT의 효용 클 것"
챗GPT가 앞으로 도덕적·비판적·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배 대표는 '창의'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항상 단어의 정의가 중요합니다. 단어의 뜻을 정의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쉬워집니다. 예전에 임원 교육을 받으면서 '창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제가 들은 얘기가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creativity(창의성)'라는 것은 'Editing and Connecting(편집과 연결)'이라는 말이 저한테는 와닿았어요. 예전에 연필과 지우개를 따로 쓰다가 번거로우니까 누군가 연필에다가 지우개를 붙였어요. 이보다 좀 더 창의성이 높은 것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연결했는데 효용이 창출됐을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애플의 아이폰 같은 것이죠. 창의를 '편집과 연결'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으로 창의성의 측면에서도 챗GPT의 효용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챗GPT에 대한 수다를 한참을 떨다 보니 어느새 걷기의 마무리 장소인 '국립극장'에 앞에 도달했다.
"자, 여기까지가 제가 즐겨 걷는 코스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걸으니 좋네요."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이어진 자리에서 배 대표는 '업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 중에 이런 사람들 있죠. 밥 한번 먹자 그러고 연락이 없어요. 가만 보면 얘가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바빠. 급한 일만 처리하느라고 인생을 다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장은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사람이 중요한 일만 하고 있어도 도태되지만, 급한 일만 하고 있어도 미래가 없어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의 본질이 뭔지 생각하고 살아야 해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의 균형을 잘 맞추면서 사는 거죠."
고객과 거래는 꾸준히 유지하고 신뢰 쌓는 일
자산운용사는 고객과 단발성의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꾸준히 유지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그렇기에 배 대표는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 상식적인 투자를 통해서 부를 늘려가고,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본인의 일을 하면서 투자에도 집중하기는 어려워요. 10년, 20년을 집중하고 시간을 쓴다고 해도 뾰족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투자하는 방법은 가장 상식적인 방법에다 돈을 넣어두는 것이죠. 투자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선 운 좋은 사람들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십년 후에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 돈 버는 방법을 제시해야 하는 거죠. 저는 우리 사회의 전체 부의 합이 올라갈 수 있도록 그런 방법을 사람들에게 찾아주려고 합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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