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송현도 인턴기자] '한국 건축의 교과서'로 불리는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서울 남산 힐튼호텔이 보존과 철거 기로에 섰다. 호텔을 매입한 이지스자산운용이 2027년까지 건물을 부수고, 그 터에 새 빌딩을 올린다는 계획을 세우면서다. 건축학계 일각에서는 '한국 건축사(史)에서 큰 의미를 가진 건물을 쉽게 허물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역사적 의의를 가진 건축물은 시장의 개발 논리와 공존할 수 있을까.
'밀레니엄 힐튼' 호텔은 1983년 서울 남산 인근에 지어졌다. 글로벌 호텔 체인 '힐튼'의 국내 최초 호텔이며, 故(고) 김중업(1922~1988), 김수근(1931~1986)과 함께 국내 1세대 건축가로 불리는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했다.
지하·지상 포함 총 25층, 연면적 8만2856㎡, 객실 684실에 달하는 힐튼호텔은 규모 측면에서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이었다. 아파트 6층 높이에 달하는 공간을 트이게 한 대형 아트리움(atrium·건물 내부에 만들어진 안뜰)은 당시 국내 건축 기술로는 처음 시도해 보는 고난도 설계였다고 한다.
이후 40여년간 힐튼호텔은 남산 자락에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다. 1999년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 산하 대우개발이 CDL호텔코리아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호텔 산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힐튼도 흔들렸다. 결국 CDL호텔코리아는 지난해 힐튼을 이지스자산운용에 매각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매매가격은 1조원대였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이 부지를 오피스·주상복합 단지로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건축계에선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4월8일 '한국건축가협회' 등 건축 관련 단체들이 공동 기획한 토론회에서 건축학자들은 "건축사적 맥락에서 근대의 징표", "국민 기억 속에 간직된 랜드마크", "이윤도 창출하고 건축문화도 보존하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 등 의견을 냈다.
생각이 다른 주인을 맞이한 건물은 철거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걸까. 일부 건축물은 예술계와 사기업 간 협력을 통해 새 생명을 얻기도 한다. 일례로 김수근 건축가의 사무소로 쓰였던 '공간'이 있다. 1972년 준공된 공간은 한국의 대표적 '붉은벽돌' 건물로 손꼽힌다. 공간은 2013년 부도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공개 매각이 진행됐지만, 단 한 개 기업도 입찰에 응하지 않아 유찰됐다. 높은 역사적 가치 때문에 문화재로 등록될 가능성이 높아 개발이 제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안시 향토 기업 '아라리오'가 공간을 매입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은 공간이 법정관리 상태에 묶여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공간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따라 등록문화재로 확정됐고, 아라리오는 공간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면서 내부를 새롭게 개조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라는 새로운 전시 및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건축 잡지인 '월간 SPACE(공간)'이 한국 현대건축 명작 2위로 꼽은 주한 프랑스대사관 공관도 유사한 사례다. 이 건물은 김중업 건축가의 대표 작품으로 1961년 준공됐다.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 위에 직선·곡선으로 표현한 처마 지붕을 올려, 서구적 미학과 한국 미를 융합한 파격적인 설계로 유명하다. 이 건물 덕에 김중업 건축가는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5년에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공로훈장, 슈발리에(기사)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건물은 점점 손상됐고, 결국 지붕 끝 일부가 무너져 초기 모습을 잃고 말았다. 프랑스 대사관이 다른 건물로 자리를 옮기면서 원래 기능도 상실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측은 이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리노베이션(보수공사)을 통해 원본을 복원하기로 결정, 대대적인 공사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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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힐튼호텔도 보존과 개발이라는 두 관점 속에서 타협점을 찾을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산 힐튼을 설계했던 김종성 건축가도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힐튼호텔의) 중요 부분인 아트리움과 기본 골조의 외벽을 놔두면서 연면적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도 재건축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송현도 인턴기자 doso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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