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증상 심할수록 돌봄 의존
간병인 스트레스, 피로 극심…'간병 살인' 치닫기도
고령 사회 日서는 '개호 살인' 통계 만들어 집중 관리
국내선 '치매국가책임제' 발표…여전히 갈 길 멀어
전문가 "간병인 지원·교육 등 포괄적 복지 필요"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내가 데리고 간다."
치매 환자인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80대 노인이 남긴 유서 내용이다. 아내를 간병해야 하는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인지 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치매는 24시간 내내 돌봐야 하는 간병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전문 간병인을 고용할 여유가 없다면, 결국 가족 구성원 중 일부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간병인과 피간병인 사이 갈등이 불거지고, 더 큰 비극으로 치닫는 사례도 있다. 이른바 '간병 살인'이다.
한국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 환자 돌봄 문제도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 간병 살해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도 없는 실정이다. 전문가는 가정 내 치매 환자 간병인에 대한 포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내가 데리고 간다' 치매 걸린 부인 살해한 남편
복수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사건은 지난 13일 오후 3시30분께 서울시 송파구 오금동 한 빌라에서 벌어졌다. 이날 A(80) 씨와 부인 B(78) 씨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부모와 연락이 닿지 않아 집을 찾아온 딸이 시신을 본 뒤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A 씨는 '내가 데리고 간다'는 내용이 포함된 유서를 현장에 남겼다. 경찰은 A 씨가 B 씨를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인 B 씨는 지난 2018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이후 A 씨는 3년간 B 씨를 보살펴 왔다. 아내의 증상이 악화하기 시작하자 A 씨는 치매안심센터를 찾아 상담과 교육을 받을 만큼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B 씨의 증세가 올해 급격히 나빠지자, A 씨는 지난 5월부터 더는 치매센터를 찾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치매 환자 간병인 스트레스 극심…'간병 살인' 치닫기도
간병 스트레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간병인이 피간병인을 살해하는 일은 지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월 전북 익산시에서도 치매를 앓는 노모를 모시던 50대 여성이 말다툼 끝에 모친을 살해하는 '간병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치매는 후천적으로 인지기능 및 기억,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는 질환이다. 인지 능력이 감퇴한다는 특성상 치매 환자는 밀착해서 돌봐줄 간병인을 필요로 한다. 증상이 심각한 환자는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해, 하루 중 대부분을 간병인에게 의지해야만 할 수도 있다.
요양원·요양병원에서 생활하거나, 전문 간병인을 고용할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형편의 빈곤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희생이 요구된다. 이렇다 보니 오랜 돌봄으로 지친 간병인과 피간병인 사이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여기에 생활고까지 겹치면 환자를 몰래 버리고 도망치거나, 심할 경우 간병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국내 치매 환자 수 80만명 이상…'간병 살인' 소수 문제 아냐
간병 위기는 절대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 가운데 치매 유병률은 10.3%였다. 노인 인구 1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인 셈이다.
지난 3월 말 기준 국내 65세 이상 인구는 857만4588명이었다. 어림잡아 현재 국내에는 85만명의 치매 환자가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전문 간병인이나 가족의 수발을 받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찍이 고령 사회로 접어든 일본은 이미 '개호(介護·병수발)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통계를 만든 지 오래다. 일본 후생노동성과 경찰청은 지난 2006년부터 각각 개호 살인 사건을 집계, 자료로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발표하는 '국민생활기초조사'에서는 노인 부부가 서로 병수발을 드는 이른바 '노노(老老) 개호' 가계 비율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현재 간병 가정에 관한 제대로 된 통계 자료조차 없는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발표하고 치매 치료·돌봄 관련 인프라 확충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한 면이 많은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민들은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직장인 C(28) 씨는 "요즘 가끔 어머니가 뭔가를 깜박깜박 잊으시면 혹시 치매가 아닌지 걱정부터 든다"라며 "솔직히 부모님이 정말 치매 환자가 된다면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부터 드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회사원 D(32) 씨는 "치매 걸린 부모님 부양도 고민이지만, 미래에 내가 치매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도 크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는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수발을 드는 간병인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지난 10년 동안 '치매안심센터' 등 치매 지원 서비스가 계속 확장됐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면서도 "현재까지의 정책이 공급자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치매 중증도에 따른 예방 검진은 물론, 치매 환자에 대한 돌봄을 제공하는 간병인에 대한 지원과 교육도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등 이용자 중심의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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